2022년 12월 25일 일요일

크래프톤 웨이와 조선사회


조선은 의외로 농업생산성이 높은 나라였다. 당시 Global Peer에 비해서도 상위권이었다. 이럼 잉여가 발생하고 상업이 발달해 새로운 계층이 등장해야 하는데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왜냐? 새로운 계급의 출현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붕괴의 원인이된다. 그래서 조선의 엘리트들은 하향평준화에 사활을 걸었다. 백성을 서로 감시하게 하고, 튀는 생산성에는 징벌적 과세를 때려 근로의욕을 감퇴시켜 최소한의 생산을 유도했다. 골때리게도 결과는 대성공. 600년간을 나라의 맥을 유지한다. 1392년부터 1910년까지 globally 조선만큼 나라를 오래 유지한 나라가 또 어디 있는가? ㅋㅋㅋㅋ (중국의 붕괴와 제국주의만 아니었으면 아직까지도 조선이었을 듯)


<크래프톤 웨이>를 읽었는데 장병규가 숨막히는 꼰대로 나온다. 사람들 볶고, 면박주고, 짜르고 ㅡ 그렇게 회사가 십수년간의 위기 끝에 마지막에 베틀 그라운드가 빠방 하고 뜬다. 크래프톤은 조선의 길과는 대척점을 걸었다. 그러니 몇번이나 망할 뻔 했지ㅡ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우리 회사는 구성원간 화목이 제일 중요하다.” 라고 하면 성장을 안 하면 된다. 마치 조선이 그랬던 것 처럼. Operating cost만 marginal하게 뽑으면서 말이다.


성장은 갈등을...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파열을 야기한다. 마치 작은 부대에 너무 많은 술을 담으면 부대가 찢어지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파열을 야기한다. 


  의미 있는 성장을 하려면 “좋은 게 좋은 거다.” 갖고는 부족하고, 또 의미있는 성장이 일어 났다면, 그 과실을 어떻게 할 꺼냐로 또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ㅋㅋㅋㅋㅋ 철퇴들고 정몽주를 찾아갔던 그 이방원의 악랄함. 이 있거나 내가 손에 피뭍히기 싫으면 그걸 대신해줄 누군가가 곁에 있거나.


조선과 크래프톤은 trade-off

2022년 12월 18일 일요일

잘 치는 아마추어 vs. 못 치는 프로

  벌써 10년 전 일이다. 은퇴한 모기업 CEO가 시니어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입상을 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내가 비법을 물어보자 그는 답했다. 


 벌써 10년은 된 야기기다. 은퇴한 모기업 CEO가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입상을 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내가 비법을 물어보자 그는 답했다.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면 말이야. 제대로 직업 갖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 다들 건물주거나 상속받아서 놀면서 하루 종일 골프 레슨 받고 매일 라운딩나가고 그래. 근데 내 생각에 하루에 2시간 이상 골프 연습하는 사람은 아마추어가 아니야. 그들은 못 치는 프로일 뿐이야. 프로랑 생활이 똑같잖아? 나는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1시간씩만 연습하고 출근했어. 내가 아침마다 1시간 공을 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내가 대회에서 만나게 될 경쟁자는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하는 사람이야. 내가 아침에 친 공 1개가 경쟁자의 10개와 같아야 돼.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 생각을 해야지. 연구를 하고. 단 한 개의 공도 허투루 치면 안 된다. 이 말이야. 그게 아마추어야. 하루 종일 건물주 사장이 와서 닭장에서 공을 친다고 해도 진짜 정성을 다하는 타가 몇 타나 될꺼 같나? 골프는 정타의 운동이지 장타의 운동이 아니야. Longest? 이런 건 의미 없어. 매일 1시간 일찍 일어 난다. 그리고 그 1시간 1타를 소중하게 친다. 이게 나의 비법 전부야.” 

끝.


[여러가지 생각들]

1. 점심시간에 러닝머신에 오르면서 이 생각한다. 오늘 20분은 어떻게 뛸 것인가? 

2. 인생에서 모든 일은 -심지어 연습이더라도- 1번에 불과 하다. 

3. 저건 본업이 아닐 때 적용되는 얘기라서 본업할땐 저 생각 안함. 본업을 잘해야 되는데ㅠㅠ

4. 저때 아저씨가 68살인가 그랬는데, 아름다운 공의 궤적이 잊지 못해서 이야기와 함께 이미지를 기억한다. 이제 여든. 

5. 주식도 그럼. 데스크 프롭 PM 보는 material 똑같이 보고 하루종일 주식생각하고 포트폴리오 꾸리면, 프로를 이기겠냐? 걍 못하는 프로지. 

6. 공부를 하는 것은 중요. 하지만 아마추어의 어프로치는 프로와 달라야 함. 프로가 못하는 것을 아마추어는 할 수 있음.

2022년 12월 10일 토요일

3.1운동과 미국의 시대

 3.1 운동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3.1 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받은 한국 지식인들이 연대해서 민족대표 33인이 기미독립선언문을 씀  

     고종의 장례식이 도화선

     민중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3.1 운동이 벌어짐

     그 결과 유관순 언니가 장렬히 산화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했고, 김규식은 임정대표로 파리강화회담에서 문전박대 당함, 일본은 문화통치로 통치방식 변경함

 

슈퍼파워 미국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



<우드로 윌슨, 28대 미국 대통령 1913~1921, 학자출신 민주당 대통령이고 1차 세계대전을 수습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미국은 세계무대를 겉돌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갑자기 세계무대의 한복판으로 불려 나왔다. 1차 세계대전은 온전히 유럽의 힘으로만 수습하기 어려운 혼파망이 되었고, 대서양건너의 은둔의 대국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1차 세계대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이야기했다즉 미국이 제시한 비전은 19세기초 빈회의에서 형성된 세력균형’ 패러다임을 집단안보’ 패러다임으로 변환을 뜻했다.


식민지 민족들아, 앞으로 니들 미래는 니들이 알아서 해라.” 

 

윌슨이 급사하며 윌슨 독트린(?)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미국이 고립주의를 끝내고 세계를 향해 미국의 비전을 보여준 첫 걸음이었다.

 

참고로 미국은 건국 이후 윌슨까지 고립주의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고립주의 자체가 금과옥조가 아니라, 미국이 고립주의를 견지하는 것이 미국 국익에 가장 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유럽은 미국의 시장이었고 한쪽 편을 들다가 절반의 수출시장을 잃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고립주의 역시 철저한 pragmatism의 발로였다.

 

#미국의 고립주의 유구한 전통

 

토마스 페인 상식(1776)에서 기원, 유럽은 무역시장이니 어떤 나라와도 편파적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됨. 유럽의 분쟁으로부터 피하는 것이 미국에 참다운 이익

 

초대 워싱턴: 1796년 대통령 출마 포기하면서 미국 고립 천명아메리카는 유럽에 개입하지 말고, 유럽도 아메리카에 개입하지 마라.”

 

3대 제퍼슨: 도덕률 강조, 세력균형에 따른 정치 동맹 거부

 

5대 먼로: 고립정책의 방점 1823년 연례교서에서 먼로주의 천명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1차 세계대전 즈음이 미국이 세계 무대로 갑툭튀한 배경을 알아보자!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시작하여 191811월에 끝났지만, 미국이 영국을 앞지른 건 꽤 오래전 일이다. 이미 1860년대에 미국은 영국의 인구를 추월하고, 10년 정도가 더 흘러 1870년대가 되면 미국이 영국의 GDP를 본격적으로 추월하기 시작된다.


미국이 패권을 넘겨 받기 시작할 때는 영국의 GDP를 추월한 40년 정도 이후부터이며,  미국이 영국의 패권을 완전히 넘겨 받는 데까지는 그로부터 70년이 걸린다.

 

이미 후기 빅토리아시대에 대영제국보다 미국의 GDP가 더 컸다는 말이고, 격차는 점점 확대되어 1차 세계대전 즈음이 되면 미국은 유럽 대륙의 누구도 비빌 수 없는 초강대국이 된다. 미국 자신도 스스로의 힘에 대해서 온전히 자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대영제국은 세계를 하나의 스탠다드로 네트워킹 하려는 기획이었다. 영국이 쌓은 제국의 연결망을 후발주자 미국이 착실히 활용했다. 전시에는 군수물자와 재정 차관 공여로, 전후에는 영국과 서유럽이 개척했던 시장을 잠식하는 활발한 해외투자를 통해서 말이다.

 

영국인들은 20세기 진정한 패권국은 대영제국이 아니라, 미합중국임을 자각했다. 영국은 영연방(Commonwealth)의 수장이었지만 영토나 자원에서 미국에게 게임이 되지 않았다. 식민지의 값싼 인건비와 자원에 의해서 대영제국은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고, 영국의 생산성은 미국의 생산성에 비비기 어려운 수준으로 뒤처지고 있었다.

 

미합중국은 50여개 다른 단위로 구성된 하나의 제국이다. – Maxwell Aitken”

 

미국의 성공은 광대한 영토와 인구,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생산과 경제운영에서 뛰어난 기획력의 결과였다. 미국은 거대 시장(오대호에서 리오 그란데강까지)에 산업생산의 표준화를 이룩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였다. 미국에서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대량 생산하고, 대량 유통하고 대량 소비할 수 있었다. 반면 영국은 생산, 투자, 해외무역 모든 부분에서 미국에게 철저하게 뒤지고 있었다.

 

1920년대 전후 유럽의 경제호황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한 결과였다. 이전까지 자본수입국이었던 미국은 유럽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Evans Clark에 따르면, 미국의 번영은 미국적 방식의 승리였다. 유럽 각국이 미국의 도전에 대응하려면 미국의 방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때까지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갑자기 높아졌다는 것을 잘 자각하지 못했다. 반면 유럽인들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920년대 영국은 전후 전례 없던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했다. 캐나다는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 남아공 등 영연방의 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다. 1921-25년 미국과 호주/뉴질랜드 무역은 3, 남아공 2.5~4배커졌다. 경제적 관계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관계의 증진으로 이어진다.

 

19255월 대영제국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전격적으로 독자적인 금본위제로 복귀한다. (이때 재무장관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대영제국의 금본위제 복귀는 날로 커지는 대영제국 네트워크의 미국 영향력을 지연시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으나 대영제국의 관뚜껑에 못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스털링화의 급격한 평가절상에 따른 수출산업은 파쇄되었고, 노동계급 생활 수준 하락하였다. 영국 경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제국도 급속히 해체된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물론 영국경제도 미국에 존속하는 형태가 되어 버렸고, 유럽 각국이 미국적 방식을 받아들이며 유럽은 결국 달러에 의존한 경제로 급속하게 재편되었다. 미국식 질서를 수용한 유럽은 경제가 성장할수록 미국달러화가 더 필요한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이제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화는 시간문제였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유럽에서 거래되는 달러를 유로달러(offshore USD)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아.. 말이 좀 샜는데 한줄요약: 대영제국 급격 쇠락, 미합중국 짱짱맨 등장)

 

미국의 등장과 함께 급변하는 세계 정세: 영국의 현실주의→ 미국의 이상주의


1차 대전 후 미국이 유럽의 시어머니로 등장했다.

 

미국은 모범적인 공화제 사회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특권계급이 없고 출생보다 개인적 가치의 표현이 한 인간의 측정기준이 되는 기회의 땅(Land of opportunity)였다.

 

윌슨이 생각한 연합국의 목표는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고, 프로이센 군국주의는 그 자체로 옳지 못하기 때문에 격퇴의 대상이었다. 구시대 제국이었던 영국처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낡은 세력균형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미국정도 힘있는 국가가 이상주의 들고 나왔다. 그 연장선에서 진 놈들 식민지 좀 풀어줘라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발표되고, 세계 정세는 새로운 phase로 진입한다.

 

우리는 세계의 일원이다. 인류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유럽의 것이든 아시아의 것이든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일이다.” -윌슨

 

유럽인들은 미국의 뜬금없는 이상주의를 처졸린 이야기로 취급했지만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들은 경제를 미국에 이미 의존하고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마셜 플랜에 의존할 예정이었다. (힘이 있는 나라가 하고자하면 해야지 ㅋㅋ)

 

윌슨의 이상주의는 국내외 반대로 좌초되긴 했고 (특히 공화당 장악이었던 상원), 윌슨이 돌연 사망하는 바람에 동력을 급격하게 상실하지만, 행정력의 관성은 이어져 이후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화려하게 꽃핀다.

 

소결: 19세기초 빈회의에서 형성된 세력균형패러다임이 20세기초 파리강화회의 이후 형성된 집단안보패러다임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 흐름은 지속되어 미국이 주도한 집단안보패러다임은 이후 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한 미국이 참여한 국제연합(UN)으로 결실을 일단락된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와 일본


미국이 집단안보를 기지로 세계질서를 재편하자,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국가들은 일본과의 관계를 바꾼다.

 

     1920년 미국에서는 일본인 이민자를 축축하는 법률이 통과 (인종차별적)

     1902년 이래 30년간 유지되던 영일동맹 종료

 

이 전환기에 한국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이라는 변수에 기대를 걸면서 경제적, 문화적, 외교적 측면에서 실력양성론이 등장한다.


반면,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 지속한다. 실력양성론은 불의와 타협한다는 강성한 노선을 지속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항일무장투쟁은 세력균형의 패러다임 속에서의 독립운동이었다.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국제사회를 희망했다.

 

 

X된 일본


일본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 1차 세계대전 모두를 이겼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서방세계(the West)의 일원으로 공인받으며 후쿠자와 유키치가 꿈꿨던 탈아입구를 40년만에 쟁취하기도하였다.

 

그런데 일본제국의 가장 영광스러운 지점, 탈아입구의 현장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쎄한 느낌을 받는다. 서방의 모든 나라의 지지를 받는 와중에 신출내기 열강 미국의 지지는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2년후인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은 완전히 달라진 슈퍼파워 미국을 만났다.

미국은 영국과 달리 각자 해쳐먹고 우리끼리 평화를 지키자는세력균형의 입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워싱턴 회의 결과 3가지 영역에서 미국의 견제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중국에 관한 9개 조약이 체결되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4개국은 태평양 섬들에 대한 조약을 맺었다. 이로서 영일동맹은 공식 종료되었다.

 

1. 군사적 영역: 해군 군축

2. 영토여역: 중국에서 이권문제,

3. 외교영역: 영일동맹해체,

 

일본의 경제가 발전하며 민중세력이 성장하면서 의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맹아가 자란다. 하지만 일본의 온건한 지주 및 중산층은 의회주의로 발전하지 못한다. 도리어 그들은 극우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메이지와 쇼와시대를 연결하는 군국주의로 급속히 재편된다.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영국과 다른 모습의 새로운 패권국 미국의 등장을 보며, 미국식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엇나가면서, 미국과의 전쟁은 필연적(inevitable)이 되었다. 20년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원자탄 2방 먹고 소멸된다.

 

급마무리 ㅋㅋ

 

1919년을 기점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패권이 세계의 문법을 재편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영국의 패권을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과 마찰음을 내기 시작했고 세상물정에 밝은 조선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이 점을 눈여겨봤다. 그들은 집단안보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경제적, 문화적, 외교적 측면에서 실력양성을 도모했다.

 

반면,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했다. 이들은 여전히 영국이 뿌린 세력균형패러다임에 갇혀 있었으며, 이들은 소련 혹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희망했다. 오늘날의 민족근본주의자들이 중국에 호감을 갖는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독립운동은 이렇게 이중의 국제질서에 빨려 들어갔다. 가장 협력이 긴요한 순간까지 저 둘은 극심한 대립을 반복하였으며, 해방이후에도 영구분단의 씨앗이 된다.

 

한국은 외교론과 준비론에서 언급한 일미전쟁일로전쟁의 결과로 해방되었다.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라, 온건한 민족주의의 방향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물론 한국인의 힘으로 일본을 타도하고 주권을 찾아야 한다는 정신은 계승되어야 하지만, 정신이 현실을 이길 수는 없다. 역사에서 당위적이고 급진적인 (그리고 무능한) 민족주의는 강대국들의 압력을 이겨내면서 광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민족주의를 분열시키며 영구분단에 앞잡이가 되었다.

 

한 나라의 역사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지점들이 많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부상과 3.1운동의 배경이 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살펴봤다. 이후 미국은 한국과 2차 세계대전 종전과 에치슨라인, 625(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탈냉전 등 많은 지점에서 역사를 공유하고 교차했다. 각 지점에 세계사를 함께 살펴봐야 함은 물론이다. 최소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정신무장이 아니라 현재를 살기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면.

 

2022년 12월 7일 수요일

감마 쇼파의 추억

 이 집에 이사한지도 어언 3년이 지났다. 


신혼집에서 와이프가 거지 같은 쇼파를 사와서 이사하면서 버렸다. 


그리고 새 집에 놓을 새 쇼파를 보러 다녔다. 


기왕 사려면 제대로 된 쇼파를 사자고 해서 쇼파 공부도 하고 가죽공부도 하고... 


그때 재밌었는데..ㅋㅋㅋ 아무튼 


분당 어디선가 감마 쇼파를 찾았다. 


물론 감마쇼파도 여러가지 등급이 있겠는데, 내가 찾은건 우리 거실에 놓기에는 약간 커보였지만 가죽의 상태나 색깔 디자인 모든 것에서 마음에 들었다. 


판매자는 내가 2달 넘게 쇼파를 공부했으며, 주말마다 와이프와 쇼파 매장을 돌고 있고, 어떤 것이 됐든 쇼파를 살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쇼파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알았다. 


감마 쇼파의 상위라인은 가죽이 상당히 좋다. 


다른 가죽 쇼파가 수 많은 무두질을 통해 소가죽을 넓게 펴는 것에 반해 감마는 무두질을 최소한으로 해 보통 쇼파보다 3-4배 두꺼운 천연가죽을 사용한다. 


짙은 애머랄드 빛 계열의 야리꾸리한 쇼파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자. 


판매자가 말했다. 


"1500까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8할 넘어왔다. 그리고 판매자 역시 나의 마음을 읽었다. 판매자는 평생 가구 판매만 해왔던 사람일텐데, 태어나서 처음 쇼파 사러온 나의 마음을 간파하기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이였겠지. 


그리고 1500은 부담스러워하는 나의 마음 역시도 놈은 읽었다. 


놈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객의 마음에 쐐기를 박을 회심의 일격, 세일즈맨 평생의 비기, 마지막 필살기!!


"사장님.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1500 커보이지만 한 쇼파 10년 쓰신다고 보고, 감마쇼파는 질이 좋아서 관리만 잘하시면 20년도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럼 매달 5-10만원씩 낸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거에요." 


라고 나에게 말했다. 정신이 번뜩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에게 1500을 내라고 하면 고려해보겠지만, 1-20년간 매달 5-10만원을 내라고 하면 너무 큰 돈입니다. 앞으로는 손님에게 그런 논리는 쓰지 마세요." 





 

2022년 12월 2일 금요일

슈퍼스타 손흥민.

어제의 손흥민을 보니 2009년 WBC 결승전의 이치로가 생각났다. 


타격기계 이치로는 10년간 MLB를 성실하게 씹어먹고 있었지만, 어어째서인지 2009년 WBC 타석에서는 부진을 계속했다. 잇단 실언을 한 한국인들에게는 물론, 일본 현지에서도 WBC의 이치로를 두고 험악한 여론이 형성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치로는 결승전 9회말 마지막 타석에서, 마치 그동안의 타격 침묵이 이 순간을 위한 복선이었다는 듯이 임창용의 뱀직구를 멋지게 쳐내며, 일본에 우승을 안겼다. 


슈퍼스타란 무엇일까? 


가장 많은 득점과 가장 많은 어시스트를 해주는 사람? 2009년 결승전 이치로는 나에게 슈퍼스타가 무엇인지 알려줬다. 슈퍼스타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많은 중압감과 부담을 갖고서 가장 중요한 한 방을 해 내는 사람이다. 


어젯밤 후반 45분이 지난 시각. 


손흥민은 골문 앞으로 미친듯이 질주했다. 그의 드리블을 따라 재빠르게 포르투갈 수비수는 엉겨붙었다. 어느새 그 수비수 4명이 그를 애워쌌지만 손흥민은 차분히 8명의 다리사이를 통과해, 같이 달려오던 황희찬의 앞으로 패스했다. 


손흥민의 공이 조금 늦었으면, 황희찬의 업사이드, 손흥민의 공의 강도가 세거나 약했으면 패스미스, 방향이 한치라도 틀어졌으면 인의 장막을 쳤던 수비수 다리 8개 어디라도 걸렸으리라. 


다행히 우리가 모두 목도했다시피 손흥민은 그러지 않았고, 황희찬에게 자로 잰듯한 패스를 선사했다. 


손흥민은 안면부상으로 카타르 내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성미급한 대중은 "흥민이는 월드 크라스가 아닙니다."라는 그의 아버지 손웅정옹의 짤을 돌리며 그를 조롱했다. 


하지만 손흥민은 왜 그간의 부진과 부상에도, 감독이 손흥민을 선발출장시켰는지 스스로 증명했다. 


왜냐면 손흥민은 슈퍼스타이니깐.




2022년 12월 1일 목요일

정말 산만하게 제조업 하는데 희한하게 다 잘 만드는 회사 – Yamaha 이야기

1. 초등학교 4학년 합주 시간에 리코더 시험을 봤다. 문방구에서 파는 국산 리코더가 2천원 정도 하는 리코더를 사서 갔다. 리코더든 희한하게 저음내기가 어렵다. 도레미가 소리를 삑삑 소리 안내고 불기 어렵다. 모두들 저음에서 귀에 거슬리는 삑삑 소리 내는데, 당시 우리 반 1등이었던 똑순이 여자애(서울 법대 나와서 지금 판사됨)가 영롱한 소리를 내었다.


“야 너 리코더는 왜 흰색이냐? 이거 반칙아니야?”


“명필이 붓을 가리겠느냐? 니가 못 불어 놓고 왜 붓 타령이냐?”


라고 1등이 말했지만, 나는 저 흰색 요술피리에 비밀이 있을 거라는 걸 직감했고, 쉬는 시간에 몰래 파란색 케이스에 YAMAHA라고 써있는 것을 노트에 급하게 옮겨 적었다. 저때 알파벳 대문자만 읽었던 시절이라 야마하인지도 모르고 와이에이… 이렇게 알아갔다.




2. 집에 와서 엄마에게 보여주니 엄마가 야마하라고 읽는 거라고 알려줬고, 나는 엄마에게 만원을 받아 예술의 전당 앞에 있는 악기상을 찾아갔다. ㅋㅋㅋㅋ (나도 극성임ㅋㅋ)

“아저씨 야마하 리코더 주세요.”

“만원이다.”




3. 오천원 받아왔으면 망할 뻔했음을 안도하며, 그 영롱한 파란 케이스에 쌓인 마적을 내 손에 넣었다. 이때 어린이 요금이 200원이었음. 남부터미널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야마하 리코더로 도,레,미를 불어 보았다 ㅋㅋㅋㅋ 역시 명필은 붓을 탓할 시간에, 명기를 산다ㅋㅋㅋㅋㅋ


내 리코더에서 도,레,미 소리가 났다. 


리코더 시험에서 만점은 단 3명이 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였고, 다른 하나가 그 판사 여자애, 또 다른 애는 국산 리코더로 그냥 잘하는 애 ㅋㅋ

(여기까지가 서론)


4. 창업자 야마하 토라쿠스는 피아노 조율사였다. 그래서 소리굽쇠 3개를 교차시켜 야마하 로고를 만들었다. 




피아노를 수리하다가 피아노를 만들었고, 피아노를 만들다 목공기술을 습득하여, 그거로 2차 세계대전 전투기 프로펠러를 제작하였다. 프로펠러를 만들다 보니 엔진 기술을 습득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엔진기술을 이용해 오토바이를 만들고, 제트스키도 만든다. 목공기술로 양궁도 만들었다.


5. 1930년에는 세계 최초의 음향연구소를 만들었고, 처음 PC 사운드 카드 만드는데도 참여했다. 이 음향연구소에서 일릭기타, 드럼 이런거 만들어 내고 다 잘 만들어 낸다. 특히 드럼은 세계 1위. 


6. 피아노도 잘 만들고, 특히 Bosendorfer, Steinway와 아들들이 그랜드 피아노 하나에 수억씩 하는거에 비하면 굉장히 가성비가 뛰어난 피아노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형피아노는 Yamaha가 원탑 아닌가? (물론 CFX같이 2억짜리 피아노도 만듬. 그리고 CFX는 Bosendorfer, Steinway와 같은 유럽의 음악사와 함께한 피아노와 비교될 만큼 좋다고 한다)


7. 야마하가 자동차를 만들지 않은 것이 의외인데, 사실 야마하 브랜드로 자동차가 안 나와서 그렇지 도요타와 닛산의 고성능 내연기관을 설계 납품하기도 했다. 지금도 렉서스의 ISF, LFA에 들어가는 V8, V10 엔진은 야마하가 만든다. 일본 뿐 아니라 포드 및 볼보의 엔진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8. 골프채도 만들고, 물론 좋다고 하는데 인프레스 이런거 말이다. ㅋㅋ 


9. 내수용으로 변기를 만들어 American Standard와 경쟁하고 주방기구도 만든다고 한다. (일본의 한샘?ㅋㅋ)


끝.


ps. 삼익악기도 1996년에 목공 기술을 사용하여 양궁을 만들어 양궁 세계 1위를 찍기도 한다. 영창피아노 인수 건도 그렇고, Steinway & sons 최대주주 사건도 그렇고 삼익은 정말 잘 할 수 있었는데 너무너무너무 아쉬운 회사



우리는 국가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2024.12.13. Russell Napier 인터뷰 발췌 . 지금 봐도 놀랍네.. 번역은 번역기 시킴 ㅋ  Key takeaways  -------------------------------------- 역사적으로 30~40 년마다 통화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