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3일 금요일

LG전자가 하이닉스를 인수했더라면 어땠을까?

LG전자가 하이닉스를 인수했더라면 어땠을까?

종종 보이는 '떡밥'이라 한번 정리해 봅니다.

 

1. IMF와 빅딜


IMF 외환위기 당시 정부의 주도로 한국 대기업들은 이른바 '빅딜'을 하게 됩니다. 가장 뜨거운 감자는 당시 D램 점유율 2~4위를 다투던 현대전자와 LG전자의 사업부를 합치는 것이었습니다.

  • LG의 입장: "우리가 근본 있는 전자 회사이니 현대반도체를 인수하는 것이 당연하다."
  • 현대의 입장: "현대그룹의 모든 것을 걸고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정주영 명예회장)

1995년 삼성전자는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2.5조 원이라는 미증유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당시 2.5조원이 얼마나 많은 돈이었냐? 이는 당시 1995년  삼성전자를 제외한 개스피에 상장된 모든 회사의 영업이익을 합친 것과 비슷했고, 삼성전자가 1969년 창사이래 냈던 영업이익을 전부 합친 것보다 많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왕회장은 인생의 마지막 베팅으로 반도체에 올인을 결심합니다.

 

 ADL의 자문을 거쳐 1999 4, 반도체 사업부는 현대가 가져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때 LG의 반발은 엄청났는데, 구본무 회장은 이에 대한 항의로 사실상 전경련을 탈퇴하기에 이릅니다.

 

2. LG의 전화위복


1999년 가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흡수합병하며 이 사태는 마무리됩니다. LG전자는 현대전자의 반도체 매각 대금 2.5조 원을 받았고, 이 실탄으로 LG기업 재무구조 개선을 이뤄내며 필립스와 손잡고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LCD 시장을 성공적으로 선점하게 됩니다.

 

이 투자로 2002 LG는 세계 대형 디스플레이 1위를 달성했습니다. 한국 TV가 소니, 마쓰시타, 샤프 등 일본의 전통의 디스플레이 업계를 제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8년 연속 대형 LCD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대박을 터뜨립니다. 또한 반도체를 포기하는 반대급부로 정부에서 데이콤도 받아 지금의 LG유플러스를 꾸리기도 하였습니다.

 

3. 승자의 저주


반면 현대전자는 어땠을까요?

현대전자는 LG반도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부채가 10조원대로 폭증했고, IMF 직후 고금리 상황을 고려하면 매년 이자 비용만 최소 1조 원이상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IT 버블 붕괴로 D램 가격(128Mb) 1년 만에 10달러에서 1달러 미만으로 1/10 이하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당시 현대반도체는 D램에서 매출이 80% 나오는 D램 올인 회사였기 때문에 회사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D램이 생산단가 이하로 떨어지자 NEC,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은 수익개선을 위해 감산을 택합니다. 상식적인 일이죠. 하지만 세계 최고의 오너와 기술 경영인의 연합체였던 삼성전자는 정반대로 증산을 하며 치킨 게임을 시작합니다. 그간 벌어두었던 모두 돈을 태워 이 기회에 세계의 디램업체들을 고사시키며 시장을 독점해 버리겠다는 의도였죠.  결국 일본 메모리업체는 줄도산 해버립니다. 문제는 일본업체와 현대전자는 같은 처지였다는 거죠. 현대전자는 2001 4조 매출에 5조원의 당기순손실을 내며 부도를 냅니다. 생산단가가 판매가를 훨씬 초과하다 보니 매출보다 손실이 많이 나는 기형적 손익계산서가 나왔습니다.

 

2001 8. 현대가 LG 반도체 사업부를 삼킨 2년도 안돼 현대 그룹이 현대전자 경영권을 포기합니다. 회사는 채권단에게 넘어가고 이름은 현대전자에서 하이닉스로 바뀝니다. 참고로 그해 LG 전자 매출은 16조원이었고 5천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습니다.

 

현대반도체의 상흔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5조원의 당기순손실을 막아보고자 현대그룹은 건설, 증권 등 다른 계열사의 돈을 총동원했지만 끝내 역부족이었고 현대그룹 자체가 유동성 위기에 빠집니다. 결국 현대건설까지 무너지게 되죠. 게다가 대북사업 마저 꼬이며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은 2003년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2001년 여름 붕괴하는 현대그룹을 보며 구본무 회장은 필경 '인생사 새옹지마'를 떠올렸겠죠?

 

4. 한국 지배구조사에 길이 남을 그날.


현대가 하이닉스에 대한 경영권을 상실하자 2001년 정부와 채권단은 가장 먼저 LG전자를 찾아 하이닉스 인수 의사를 타진하였습니다. 물론 LG전자는 단칼에 거절했고, 결국  하이닉스는 인수 의사가 있는 세계 2위의 메모리 업체 미국의 마이크론에게 넘어갈 수순이었습니다.

 

마이크론은 잔여 부채를 탕감하는 조건으로 38억 불에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2002년 정부와 채권단(외환은행)은 매각과 청산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고, 당시 하이닉스 CEO 박종섭 사장도 마이크론 매각에 동의했습니다. 그렇게 2002 4월 하이닉스의 매각을 결정하는 이사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한민국 기업 지배사에 길이 남을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더욱 이사회는 요식 행위를 하는 거수기 집단에 불과하였습니다. 후딱 끝날 줄 알았던 이사회는 어인 일인지 10시간이 넘게 이어졌고, 정부와 채권단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사회 전원 만장일치로 마이크론 매각에 반대하여, 매각을 무산시켜 버렸습니다.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과, 윤계섭 서울대 경영학과, 이영선 연세대 경제학과 등의 교수들이 앞장서서 매각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1년 삼성전자의 치킨게임 끝에 일본 메모리 업체는 모두 도산하였고, 그 결과 메모리 값은 최악의 시절을 지나 어느덧 3불을 회복하던 2002년 봄이었습니다. 하이닉스 보드맴버들은 'D램은 회복 중이고, 하이닉스는 독자 생존이 가능하다. 하이닉스를 헐값에 외자에 넘길 수 없다. 이것은 주주에 대한 배임이다'와 같은 국뽕 모먼트를 보여줬습니다. 뭔가 이사회 이사들이 멋지기도 했지만 그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부와 채권단은 멘붕에 빠졌고, 이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채권단은 앞으로 하이닉스에는 어떠한 신규 자금 지원이 없음을 천명했고, 정부는 더 가혹한 구조조정을 압박했습니다이사회 직후 하이닉스 CEO 박종섭 사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임합니다.

 

5. 의지의 한국인 그리고  엔지니어들의 고난의 행군

 

하이닉스는 장비를 유지할 돈도 직원들 월급 줄 돈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닉스는 반도체(D)만 남기고 나머지 사업부를 전부 팔아버립니다. 이때 눈물을 머금고 중국 BOE LCD 디스플레이 사업부를 단돈(?) 3 8천만 불에 팔았는데, 이게 지금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초토화시키고 제패한 BOE하이디스가 되었습니다.

 

하이닉스는 D램을 제외한 모든 사업부를 팔아 실탄을 마련했고, 하이닉스의 엔지니어들은 이 실탄으로 블루칩 프로젝트(Blue Chip Project)라는 세기의 서커스 쇼를 펼치게 됩니다. 당시 반도체 공정은 0.15 마이크론에서 0.13 마이크론 공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경쟁자들은 수백억 원짜리 최신 노광장비를 수십 대 사들여 0.13 마이크론을 찍어냈습니다. 하지만 채권단의 지원이 끊긴 하이닉스에 최신형 노광장비 구매는 언감생심이었고, 엔지니어들이 0.15-0.18 마이크론을 찍던 노광장비로 0.13 마이크론 회로를 그려보자는 도전이었습니다. 빛의 간섭 현상을 역이용해 해상도를 높이는 '초해상 기술(RET)' 등 온갖 묘기를 부려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미국이 노광장비 대중 수출제재를 하자 중국 엔지니어들이 써커스를 하는 것의 데자뷰가 보이지 않습니까?) 

 

하이닉스는 새 장비를 사지 않고 기존 장비로 0.13 마이크론을 찍어냈으므로, 경쟁사 대비 2 5천억 원 이상 투자비를 절감할 수 있었고, 반도체 원가도 삼성전자보다 쌌습니다. 갑자기 하이닉스는 가장 수익성 좋은 메모리 회사가 되었네요. 그리고 마침내 매각 무산 1년 만인 2003 3분기 하이닉스는 흑자 전환에 성공하였고, 2004년 하이닉스는 2조원대의 사상 최고의 영업이익을 냅니다. (참고로 2004년에 LG전자도 휴대폰 사업부문 등에 힘입어 창사이래 최대 이익을 내는데 1.5조원 정도였습니다.) 하이닉스는 2005년에는 워크아웃을 자력으로 조기 졸업, 2006년에는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까지 향유하며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6. 다시 인수자를 찾는 하이닉스


하이닉스는 워크아웃도 졸업하고 새 인수자를 찾았습니다만, 4대 그룹 중 삼성은 독과점 문제로 못 사고, 현대차는 자동차 회사(& 왕자의 난 설거지)... 결국 LG가 사야 한다는 여론과 정부의 은근한 압박에도 구원이 풀리지 않은 구 회장의 LG는 언제나 하이닉스 인수를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2010년이 되자 하이닉스 채권단은 LG에 하이닉스를 사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이 됩니다. LG가 원하면 공개입찰도 하지 않고, LG가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다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LG의 구 회장은 감정적이었습니다. “강제로 뺐어가 놓고 이제 와서 프리미엄을 얹어 판다고.”라며 격양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결국 소거법을 거치니 4대 그룹 중 SK그룹만 남았습니다. SK도 하이닉스 인수에 부정적이었습니다. 특히나 SK는 통신사였고, 아이폰이 등장하여 PC의 세대가 저물고 모바일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시점에, 굳이 메모리 회사를 왜 사야 하는지 어리둥절했죠. 하지만 재벌의 사정이 있어서 SK텔레콤의 자회사로 하이닉스를 인수합니다. 이 재벌의 사정을 두고 여의도에는 별 소리가 많이 돌아다녔는데, 꽤 아귀가 잘 들어맞는 얘기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7. 결론

기업 인수는 주식, 부동산, 코인 등 투자와는 완전히 다른 게임입니다. 어디 주식을 사고 잊고 있었는데 대박이 났다, 아파트에 입주해 20년 존버했는데 10배가 뛰었다,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즉 정적 세계가 아니라 동적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예컨대 은마아파트를 누군가 10년전에 10억에 샀다면 그게 누구든지 지금 37억이 되었겠지만. 기업은 누가 사느냐에 따라 100조원짜리 기업이 되었을 수도 아니면 적자를 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SK의 최회장이 단순히 쇳복만 있는 게 아닐 거란 얘기입니다. 

 

일례로 HBM 얘기를 해봅시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한 것이 2012년이고 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HBM1 개발에 성공한 것이 2013년 말의 일입니다. 2016~2019년까지 HBM 수요가 없었으나 하이닉스는 HBM에 대한 R&D를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특히 2023년 메모리 불황으로 창사 이래 최악인 7조 대 적자를 냈을 때도 SK하이닉스는  HBM 투자는 오히려 늘렸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의사 결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당연히 아니고, LG그룹 산하에서도 똑같이 했을 수 있었을지 역시 미지수입니다.

 뭐 박정호 부회장이 HBM의 과감한 투자를 했다. 현대전자 출신 곽노정 CEO가 HBM 양산을 총괄했다.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인의 영역이 남습니다. 삼성전자도 경계현을 쓰느냐 전영현을 쓰느냐에 따라 완전 다르니깐요. 


LG 억울하게 반도체를 뺐겼다고 칩시다. 

LG가 반도체를 뺏긴 불과 2년 후 현대가 인수한 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다시 하이닉스를 찾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10년 내내 하이닉스를 인수할 기회가 있었고, SK에게 인수되기 직전에는 매도인이 애걸복걸하는 지경으로 하이닉스를 사달라고 했으나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2026 1월 현재 하이닉스 시총은 550조 원이 넘습니다. 17조인 LG전자 시총의 30배가 넘고 LG그룹 전체의 시총을 다 더해도 3배가 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정부에 LG가 반도체 사업부를 뺏겨서 이렇게 된 게 아니고, 전후 관계와 수많은 기회들을 봤을 때. 그저 실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8. 에필로그

쓰다 보니 생각보다 뻘글이 길어졌는데, 극적인 하이닉스 스토리를 잘 취재해서 책으로 내면 '칩 워'보다 재밌는 책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다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까요. 다 된 마이크론의 인수에 재를 뿌린 이사들도 생존해 있고, 우리도 잘해보자며 핵심 산업을 판 자금으로 구형 장비를 달래가며 0.13 마이크론을 찍어냈던 엔지니어도 다 살아 있고, 사실 그때 실무자들이 지금 하이닉스의 최고 임원을 달고 있거나 막 은퇴했죠. SK 인수 막전막후의 정부 관료와 수펙스 추구 어쩌구 다 살아 있는데. 아무도 하이닉스로 책 한 권 안 쓴다는 한국 저널리즘의 빈곤함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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