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재건의 희생양
2002년 4월 하이닉스 사외이사들의 반란으로 마이크론 매각이 최종 무산되자, 채권단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외환은행의 자기자본 2조 8천억 중 80%를
하이닉스에 빌려준 상태였으니까요. 하이닉스를 매각하여 급한 불을 끄려고 했는데, 그것이 무산되면서 외환은행이 망하게 생겼습니다.
정부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은행이 파산하게
되면 규모의 문제일 뿐 일련의 금융위기가 동반됩니다. 한국 정부가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난 것이 2001년 8월의
일이니 IMF 악몽이 끝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정부가 IMF의 악몽을 떠올리는 건 당연지사였습니다.
어쩌면 정부와 채권단에게 하이닉스 사외이사들이, 대학 강단에서
공자님 말씀이나 하는 철부지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외환은행은 어떻게 자기자본의 8할을 현대전자에 빌려줬을까요? 리스크 관리는 개나 준 걸까요? 은행법에 명시된 동일인 여신한도 규제에 따르면 은행은 자기자본의 25% 이상을
한 기업에 대출해 줄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는 IMF 외환위기와
대기업 빅딜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정부가 예외와 특혜를 만들어주며 현대전자에게 대출을 허용(혹은 압박)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외환은행은 하이닉스발 위기에 연이어 터진 카드대란 사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망해버립니다. 그 결과는 2003년 론스타에 매각되는 것이었고요. 만약 하이닉스를 마이크론에 넘기고 부실채권을 일부 정리했다면, 외환은행이
허무하게 론스타에 팔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지금 하이닉스는 없고 대신 외환은행이 있었겠네요.
변양호 신드롬.
이때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헐값으로 팔렸는가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는데,
이건 왜 하이닉스가 하이디스를 헐값에 팔았느냐 정도의 결과론적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금융위기는
초반에 불길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외환은행 매각으로 여론이 한참 안 좋아진 2006년, 검찰은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변양호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합니다. 변양호는 KS에 행시 재경직 수석 출신의 엘리트 경제 관료였습니다. 그가 총대를
메고 외환카드 사태를 조속히 마무리했지만 돌아온 건 형사처벌의 위협이었습니다.
변양호는 1심, 2심, 최종 대법원까지 모두 무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로 한국 공직사회는
아무도 책임지고 적기에 결정을 하지 않는 ‘변양호 신드롬’에
빠져버렸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변양호 씨가 직접 쓴 《변양호 신드롬》이라는 책을 봐도 좋습니다.
관치가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관치의 문제를
짚어보자면… 외환은행 부실의 시작은 외환은행이 덩치에 맞지 않게 너무 큰 현대전자 빅딜의 주관은행이
된 것이고, 더 따지고 보면 90년대 외환은행이 대우 등
수출기업에 묻지마 credit line을 제공한 것이 더 큰 관치 아니었을까요?
오히려 변양호는 그 문제를 수습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남대문에 불이 났는데, 초기에 기왓장을 뜯고 화재를 제압했더니 소방수를 문화재 훼손 혐의로
입건해서야 되겠습니까? (실제 이런 논리를 변양호 씨가 폈던 거로 기억합니다.)
나를 파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
다시.. 하이닉스 얘기로 돌아옵시다. 매각이 무산된 이후 채권단은 외환은행장 우의제를 급하게 하이닉스 CEO로
파견합니다. 우의제는 누구냐?
우의제는 1998년 외환은행 명동지점장을 지내며, 명동지점의 소매실적을 전국 꼴찌에서 1등으로 만든 공로로 이듬해
임원(상무)이 된 사람입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외환은행 상무가 된 시기가 외환은행이 IMF를 맞아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상무를 단 지 1년
만에 부행장으로, 다시 은행장 대행으로 승진합니다. 외환은행은
난파선이었고, 임원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자의든 타의든 뛰어내리기 바빴습니다.
채권자 외환은행은 행장대행을 하이닉스 CEO로 보내야 할
정도로 다급했습니다. 당연히 우의제 CEO를 놓고 하이닉스
노조는 극렬히 반대했습니다. 반도체의 B도 모르는 평생 은행원
우의제를 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노조의 우려대로 우의제는 취임 첫해 2만 5천 명이던 하이닉스 직원 중 절반을 구조조정했습니다. 하이디스 등 D램 외 사업부를 전부 팔았습니다. 돈이 될 수 있는 건 모두 팔았고, 그렇게 당장 급한 단기부채의 이자를 갚아 나갔습니다.
반면 우의제 사장은 엔지니어들이 ‘블루칩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했을 때 전적으로 믿어주고 밀어줬습니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프로젝트에 아까운 돈 낭비하지 말고 빚이나 갚으라는 옛 은행원 동료의 힐난과 정부의 압박에 저항하며, 엔지니어들의 '공밀레 프로젝트'를 육탄방어 해주었습니다.
이제 좀 먹고 살만해지나 했는데…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하이닉스에 한 줄기 빛이 들던 2003년. 하이닉스에는 다시 한번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2003년 하이닉스는 EU와 미국에서 각각
35%와 45%의 상계(보복)관세를 때려 맞습니다. 하이닉스가 망하려고 할 때, 한국 정부가 하이닉스를 망하게 두지 않고 국책은행 등을 통해 8조
원을 ‘부당’ 지원해 줬다는 혐의였습니다. IT 버블이 터지고,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고, 삼성전자가 치킨 게임을 하여 일본과 독일의 반도체 업체들은 줄초상이 났는데,
하이닉스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살아났으니 이걸 부당지원으로 보고 관세를 때린 겁니다.
게다가 D램은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삼성전자는 또 공격적으로 투자를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닉스는
블루칩 프로젝트로 간신히 연명했지만, 영원히 웨이퍼 공장 투자를 보류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정말 다음 세대 투자를 해야 하는 시점이 왔습니다. 하이닉스는
최신 12인치(300mm) 웨이퍼 공장을 지어야만 삼성과
경쟁할 수 있었는데, 공장 하나 짓는 데 최소 2조 원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빚더미라 돈이 한 푼도 없었죠.
미래를 위한 투자는 불가능하고, 현재의 수출도 불투명해졌습니다. 하이닉스는 이중고를 겪으며 이렇게 다시 망하나 싶었습니다.
현대의 DNA “전쟁이 아니고서야 우리에게 어려움은 없다.” – 아산 정주영
우의제 사장과 하이닉스 경영진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이닉스는 관세를 맞아 더 이상 한국에서 D램을 만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 해외에서 만들면 되겠다.
하이닉스는 돈이 없어서 투자를 할 수가 없는 처지다?
→ 파트너를 구해 대신 투자를 시키면 되겠다.
이때 하이닉스가 내민 손을 잡아 준 것은 유럽의 ST마이크로였고, 하이닉스에게 D램 공장 부지와 인프라를 제공한 건 중국 우시 지방정부였습니다.
ST마이크로는 유럽의 시스템 반도체 강자였지만,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부족했고
생산 수율이 안 나와 고민이었습니다. 우의제는 ST마이크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은 너희가 다 내고, 우리의 기술과 설비로 공장을 돌려서 반도체를
만들자. 그리고 지분은 하이닉스가 67%, ST마이크로가 33%. 콜?”
이렇게 ST마이크로는 현금 5억 달러를 출자하고 2억 5천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합니다. 하이닉스는 현금 투자는 1원도
안 하고, 유휴 설비와 기술력을 대기로 합니다. 하이닉스가
한 푼 안 내고 지분 67%를 갖는 하이닉스-ST 반도체
유한공사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ST마이크로와의 파트너십을 통해서 낸드플래시 기술도
공유받습니다. 당시 하이닉스는 D램 올인 구조라 D램 가격이 떨어지면 회사가 휘청거렸습니다. 차세대 먹거리인 낸드플래시
기술이 절실했는데, ST마이크로를 통해 초기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하이닉스는 낸드에서도 삼성전자에 이은 세계 2위
회사가 되었고, 낸드의 종가 도시바도 완전 인수할 뻔했으나, 현재
대주주로 있습니다.
중국 우시 정부는 토지, 인력, 인프라, 세제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공기 단축을 위해 24시간 공장 건설을 진행합니다.
현대가 조선소에서 배와 조선소를 동시에 지었던 것처럼, 하이닉스-ST도 우시에서 반도체 공장을 지으며 반도체를 생산했습니다. 이게
바로 812 프로젝트입니다. 8인치 웨이퍼 라인과 12인치 웨이퍼 라인을 동시에 지어보자는 얘깁니다.
2005년 4월 우시 공장을 착공하고, 채 1년이 안 되어 한국 하이닉스에서 가져온 설비로 2005년 말 8인치 생산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2006년 10월 12인치(300mm 웨이퍼) 라인까지 완공,
양산하며 명실상부한 월드클래스 D램 공장을 구축합니다.
(트럼프 정부가 중국에 무역전쟁을 선포했을 때 하이닉스가 중국에 공장이 많아서 난처했는데, 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이 중국에 있었던 이유가 이겁니다.)
중국에서 생산된 하이닉스 반도체는 관세 없이 미국과 유럽에 수출되며 하이닉스 신화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2006년 하이닉스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냅니다. 매출은 7조 7천억 원, 영업이익은
2조 6백억 원이었습니다.
하이닉스-ST반도체의 합작사가 대박이 터지고, 하이닉스가 완전히 정상화되던 바로 그 시점, 우의제 사장은 2007년 3월 3연임을
포기하고 용퇴합니다. 임기 중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워크아웃을
예정보다 1년 6개월이나 앞당겼고, 유럽과 미국의 보복관세에 슬기롭게 대응하며, 차세대 먹거리도 착실히
준비하였습니다. 회사가 정상화되었으니 나의 소명은 끝났다며 박수를 받고 내려옵니다.
저도 가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2000년대 중반,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오너와 기술 경영인의 초일류 연합체였다면, 동시대의 하이닉스는 세계에서 가장 헌신적인 기술자들과 전문 경영인이 일궈낸 기적의 연합체였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당시 그 전문 경영인이 평생 은행 업무만 보아온 '금융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채권단은 적절한 ‘바지’가 필요해서 우의제 사장을 낙점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하이닉스의
회생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고, 워크아웃이 실패할 경우 비난을 짊어질
'욕받이'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최악의 경우, 막대한 비용만 축낸 채 마이크론이 초기에 제시했던 헐값보다 더 낮은 금액으로 팔려 나갈 운명이었겠죠.
그 시나리오대로라면 우의제 사장은 채권단에게는 예산을 낭비했다는 지탄을, 여론으로부터는 "무지한 은행원이 기술 기업을 망쳤다"는 비난을, 그리고 실직한 직원들에게는 원망을 한 몸에 받아야
했습니다. 우의제의 가족들이 사장 취임을 극구 반대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며 "나답게 만드는 일", "진짜 좋아하는 일", "선한
영향력" 같은 말을 하는 이들을 봅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기분입니다. 20대 초반 대학생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마흔이 넘어서도 아직도 그러고 있는 애들도 있습니다.
우의제 사장이 가장 강력한 반증입니다. 우의제 사장 본인조차
평생 자신이 IT 기업의 CEO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일본의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조차 포기했을 법한 위기의 기업을
살려내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초석을 닦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줄은 더더욱 몰랐겠지요.
2002년, 우의제 사장과 하이닉스 엔지니어들의 상황을 복기해 봅시다. 회사는 풍비박산이 났고 동료의 절반은 짐을 쌌습니다. 매달 수천억
원의 청구서가 날아오고 월급은 언제 끊길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성공 가능성조차
낮은 프로젝트에 밤낮없이 매달려야 했습니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개인에게 돌아올 영화나 보상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그토록 처절하게 몰입하게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직업윤리'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개인의 '공명심'이라 하기엔 확실히 결이 다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소명(calling)이 아니었을까요. 나를 찾고 나를 나답게 하는 일?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 저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저런 길은 개인이 설계하고 준비하고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우의제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1967년 외환은행 공채 1기로 입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의제가 처음부터 외환은행에서 돋보이는
인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리 진급을 낙방하고 동기들 중에 가장 늦게 대리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지점장 신화를 쓰면서 외환은행의 임원으로 커리어가 끝났어도 대기만성 스토리로는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고, 그에게는 어떤 소명이
있었습니다.
당장 동기들보다 못 나가고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흘러 조바심이 날 때, 저는 이따금 우의제 사장을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고,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소매실적으로 임원이 된 이후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하이닉스의 구원자가 된 것처럼, 의미 없고 빛나지 않는 지금 내 눈앞의 처리해야 할 과제도, 비록 그것이 ‘반짝반짝’거리지 않는 성질의 것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 소명의 길로 가는 알 수 없는 결정적 실마리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오늘도 뻘짓하다가 퇴근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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