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일 화요일

삼성 반도체의 짧은 역사 – 1부

  한국 반도체의 시작

강기동은 1958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당시 세계 최고의 반도체 명문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당시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였던 모토로라에서 근무. 


당시 트랜지스터 제조업은 경공업이라 인건비 경쟁력이 중요했음. 미국에서 임금이 싼 여성들을 데려다가 조립시키다 더 싼 해외로 눈을 돌림. 홍콩은 미국 인건비의 1/10 수준인 시급 25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트랜지스터 생산지로 낙점됨.

 

그런데 한국은 시급이 10센트였음. 강기동은 "세계 최빈국이던 내 조국에서도 첨단 반도체 생산을 해보자"라고 생각함. 하지만 덜컥 한국으로 갔다간 산업스파이가 되기 십상이니, 미국에 회사를 차리고 한국에서는 단순 조립만 하는 구조를 만들기로 함.

 

1974년 강기동과 켐코의 회장이 미국 ICII 와 합작해 자본금 50만불로 '한국반도체'를 설립함. 한국에서도 트랜지스터 제작을 시작했으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음. 1974년 오일쇼크 여파로 1년도 되지 않아 한국반도체는 파산 위기에 직면함.

 

강기동의 서울공대 1년 선배였던 삼성전자 강진구 사장이 한국반도체의 파산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함. 그리고 이병철을 찾아가 무조건 인수해야 한다고 설득함.

 

삼성전자가 지분 50%를 인수하며 한국반도체는 강기동-삼성전자 공동 경영 체제가 됨.

 

한국반도체의 첫 목표는 디지털 손목시계용 칩 생산이었음. 1975 9월 개발에 성공함. 하지만 1976년 말부터 시장이 레드오션화되고,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들과 규모나 기술 면에서 게임이 안 되는 어려운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음. 한국반도체는 다시 한번 파산 위기를 맞았고, 이번에는 강기동 박사도 GG.

 

이병철은 삼성반도체의 미래를 두고 사장단 회의를 소집함. 적자만 나는 반도체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손절할 것인가? 사장단의 2/3가 손절하자고 함. 이병철도 긴가민가함. 그런데 후계자 이건희가 무조건 해야 한다고 주장함. 삼성전자가 인수하며 100% 삼성 소유의 반도체 회사가 됨.

 

삼성반도체는 그 이후에도 70년대 내내 적자만 보며 지지부진함. 사업 지속 여부는 매해 논쟁거리였음. 이병철 본인도 반도체에 대한 감을 잡지 못함.

 

1983년 도쿄 선언

그러던 와중 1982년 이병철은 보스턴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는 소식에 미국을 방문함. 미국 각지를 순회하고 돌아온 이병철은 PC와 그 속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직접 목격한 후 반도체에 사운을 걸기로 결심함.

 

그리고 1983 2, 삼성이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급 사업에 진출한다는 '도쿄 선언'을 발표함. 사실상 여기서부터 삼성 반도체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함.

 

64K D램을 만들어 봅시다!

1983년 삼성반도체의 첫 목표는 64K D램을 개발 및 생산하는 것으로 정해짐. 샤프의 사사키 박사가 도움을 많이 줌. 사사키 박사는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에게 미국에 연구소를 만들고 한국에 공장을 세워서 D램을 만드는 방안을 추천함.

 

64K D램은 1981년에 개발되었고 D램 사이클이 3~4년이니, 삼성이 개발을 시작했을 때 64K 반도체는 이미 끝물이었음.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은 이미 256K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음. 그래서 오히려 설계도도 구하기 쉽고 기술 이전도 용이할 것으로 생각함

 

1983년 강진구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인텔, 허니웰 등 미국 최첨단 반도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최고급 인재들을 모음. 이임성, 이일복, 이종길 박사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스카우트함. 하여 1983 7월 미국 산타클라라에 현지법인 설립.

 

전쟁의 상흔을 겪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유년기를 보낸 한국인 박사들이 '사업보국'의 부름에 응답함.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미국 일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당시 돈으로 이미 10만 불 넘는 연봉을 받으며, 캘리포니아의 수영장 딸린 집에서 자녀를 키우던 사람들이었음. 가난한 나라에서 공부도 시켜주고 장학금도 주어 유학을 보내주었으니, 이제 조국에 보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임.

 

초기 실리콘밸리 삼성반도체 연구소에는 애국심으로 무장한 한국인 박사들 외에 숨은 공신들이 더 있었음. 바로 중국계 미국인 박사들이었음. 마침 타이밍이 좋았음. 인텔, TI 같은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일본과의 메모리 경쟁에서 밀려 마진이 박해지자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고 있었음. 대신 CPU 같은 새로운 분야로 사업을 전환하는 중이었음. 이때 인텔 TI등에 근무하던 중국계 이민 3, 4세 박사들이 대거 삼성전자 연구소로 이직함. 미국의 삼성반도체 연구소는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는데, 이후 256K 1M D램 등을 개발할 때 한국 연구소와 미국 연구소를 경쟁시킨 뒤 상호보완하는 방식으로 시너지를 냄.

 

어쨌든 한국과 미국에 연구소까지 만들고 64K D램부터 제작하려 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64K 기술을 순순히 넘겨주는 회사는 없었음. 일본의 모든 회사가 거절했고, 이건희가 TI사를 직접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함.

 

이때 미국의 마이크론이 자금난에 빠짐. 이를 기회로 삼성은 마이크론과 125만 불에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함. 하지만 마이크론 역시 쉽사리 기술을 주지 않았음. 연수를 간 삼성 엔지니어들을 스파이 취급하며 경계했고, 결국 6개월 동안 기술을 순차적으로 도입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며 한 달 만에 연수가 끝나버림. 64K D램을 만들 때 마이크론에서 배워온 설계에 문제가 많아 이를 자체적으로 보완해야 했고, 결국 1984 7월에 이르러서야 완전 동작 칩을 개발하는 데 성공함.

 

공장을 지어 봅시다! 어디에? 서울 1시간 통근 가능 위치에

반도체 공장 부지는 1982년부터 고민함. 이병철의 오더는 '서울에서 1시간 거리, 고속도로 접근성이 좋은 5만 평 부지'였음. 이에 따라 1983 6월 기흥이 최종 낙점됨. 외국에서는 보통 2년이 걸리는 반도체 공장을 삼성은 단 6개월 만에 완공함. 비결은 24시간 연속 공사였음. 콘크리트가 자연 양생되는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대형 히터를 틀어놓고 강제 가조조를 시키기까지 함.

 

원래 대규모 공사 현장에는 인부 숙소와 급식실부터 만들고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나, 워낙 일정이 급해 그런 것도 없이 걍 텐트를 치고 공사를 진행함. 그럼에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음.

 

미국에서 노광 장비를 들여오던 날, 기계가 워낙 예민해 미세한 진동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음. 김포공항에서 기흥공장까지 수차례 리허설을 거쳐 시속 30km 이하로 서행 운반하기로 함. 공항에서 물건을 받아 트럭에 싣고 운송하는 데 성공했으나, 공장 진입 전 마지막 4km 구간의 비포장도로가 최대 고비였음. 결국 오전에 땅을 긴급 포장하고 오후에 물건을 이송하는 작전을 펼침.

 

1983 9월 착공한 기흥 1공장은 1984 3, 불과 6개월 만에 완공됨. 연인원 20만 명이 공휴일과 신정 연휴도 반납한 채 나와 불철주야로 만들어낸 결과였음. 그야말로 미친 사람들임.

 

그리고 공장이 다 지어지기도 전인 1983 12, 이미 64K D램 개발에 먼저 성공함. 당시 전 세계에서 64K D램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 단 두 나라뿐이었고, 기업도 미국 회사 4, 일본 회사 6개 정도에 불과했음.

 

참고로 이때 개발된 64K D램은 현재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이어서 도전한 분야는 256K D램임. 당시 일본의 NEC, 후지쯔, 미국의 인텔 등 단 3개사만 생산하고 있던 최첨단 기술이었음. 삼성은 1984 10 256K 개발에도 성공함. 삼성반도체는 생산 라인 구축과 제품 개발을 동시에 진행하는 과감함을 보여줌. 이미 1984 8월부터 256K 공장을 짓기 시작해 바로 생산에 돌입했고, 이어 1986 7월에는 1M D램 개발까지 연이어 성공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메모리 회사로 도약하게 됨.

 

죽음의 치킨게임과 메모리 장기불황

1984년부터 야심 차게 64K D램을 생산하기 시작함. 그런데 바로 이 시점부터 D램의 장기 불황이 시작됨. 전반적인 IT 경기도 식어가고 있었고, 일본의 선도 업체들이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회사들을 고사시키기 위해 생산량을 대폭 늘리며 이른바 '치킨게임'을 개시함.

 

1984년 초만 해도 개당 3.5달러 선이던 64K D램 가격이 50센트를 하회하는 수준까지 폭락함. 당시 삼성의 64K D램 제조원가는 1.7달러였음. , 제품을 하나 만들 때마다 개당 1.2달러씩 손해를 보는 구조였음.

 

어차피 한국반도체(삼성반도체) 1974년 창립 이후 10년간 한 번도 흑자를 보지 못한 회사였음. 하지만 1983년 이전과 이후는 적자의 질과 양이 완전히 달랐음. 그전까지는 그룹 내에서 마이너 사업부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고 1984~1985년 막 D램을 구워내기 시작한 시점이었음. 적자의 체급자체가 달라진 것임.

 

제조원가에도 못 미치는 폭발적인 적자가 누적되면서 삼성전자는 미증유의 적자 대행진을 시작함. 1985년 한 해 반도체 부문의 적자만 428억 원에 달했음. 이 금액이 어느 정도 규모였냐면, 당시 재계 1위였던 현대그룹의 핵심 캐시카우인 현대건설이나 현대자동차가 1년에 내는 순이익과 맞먹는 수준이었음.

 

삼성 메모리의 독자 생존이 불가능해지자 이병철은 삼성전자 내에서 가장 우량한 사업부였던 '통신' '반도체'를 합병하여 '삼성반도체통신'을 출범시킴. 가전과 통신의 이익으로 반도체의 거대한 적자를 메우며 희석시키는 고육지책을 쓴 것임.

 

1986년 당시 반도체 1, 2공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극심한 적자로 인해 2공장은 1년 가까이 제대로 가동조차 못 하고 셔터를 내린 상태였음. 참고로 1공장 건설에 1 5,000만 달러, 2공장에 2 5,000만 달러가 투입된 상태였음. 1987년에 이르러 삼성전자 D램의 누적 적자는 결국 1,000억 원을 돌파함. 이러다가는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가 날아갈 수 있다는 위기설이 파다했음.

 

호사가들은 오너가 말년에 첨단산업 뽕에 취해 중진국이 감당해서는 안 되는 '뜨거운 감자'를 삼킨 것이라며 수군거림. 메모리 반도체의 세대 주기는 3~4년으로 매우 짧고 투자 금액은 천문학적이라, 후발주자가 불황을 만나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임.

 

실제로 일본 미쓰비시 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 사업은 인구 1억 명 이상, GNP 1만 달러 이상, 국내 소비가 50% 이상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사업"이라고 못 박음. 당시 대한민국은 GNP 1,800달러, 인구 4,000만 명의 조건에 불과했으니 대기업의 무모한 도박으로 보일 만했음.

 

2공장을 못 돌리는데 3공장을 돌린다.

1986년 당시 차세대 1M D램 등의 생산을 고려하면 3공장을 지어야 하는 시점이었음. 하지만 뜻밖의 메모리 불황으로 이미 지어놓은 2공장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음.

 

3공장을 짓는 데는 3 4,000만 달러가 들어가야 했는데, D램 생산 시작 이후 누적 적자만 이미 1,000억 원에 이르고 있었음. 당시 1,000억 원은 삼성그룹 전체의 1년 순이익과 맞먹는 수준이었음. 여기에 추가로 3 4,0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3,000억 원)를 더 투자해야 하는 상황임.

 

원래 계획대로라면 1986년 초부터 3공장을 지었어야 했으나, 회사의 적자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누구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함. 그렇게 하루이틀 미뤄진 것이 어느새 6개월이 지나버림. 그러던 1987 8월 어느 날 아침, 강진구 회장에게 이병철의 전화가 옴. “3공장 안 짓고 뭐하노내일 3공장 기공식 한다.” 그렇게 기흥 3공장 건설이 전격적으로 시작됨.

 

“3라인 착공은 1986년부터 생각한 거였다. 3라인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중소기업으로 전락한다. 정말 모험이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견고하고 질 좋고 아름답게 지어라.” – 이병철

 

희망의 불씨

삼성이 3공장을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D램 시장은 오랜 장기 불황을 끝내고 마침내 반등하기 시작함. 30센트까지 폭락했던 64K D램은 2.3달러까지 치솟았고, 개당 1.5달러 선에 머물던 256K D램 역시 4~6달러 선까지 가격이 오르며 최악의 불황이 끝을 고함.

 

 

저승사자의 등장

1980년대 중반 글로벌 D램 치킨게임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그야말로 선혈이 낭자한 상태였음.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무차별적인 덤핑 공세로 미국의 D램 회사들이 줄초상을 맞이했고, 일본 업체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80%를 넘어서며 사실상 독점 체제에 진입함.

 

하지만 일본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 역설적으로 이병철이 1983년 미국 순방에서 목도하고 기회를 포착했던 결정적 모먼트가 됨. 당시 미국 사회는 군사적으로는 소련에 밀려 냉전에서 패배하고, 산업 경쟁력은 동맹국인 일본에 밀려 완전히 쇠퇴하고 있다는 공포감과 패배주의가 절정에 다다라 있었음.

 

그런 와중에 첨단 기술의 핵심인 메모리 칩 세계에서 일본이 대놓고 불공정 게임을 벌여 미국의 반도체 제조사들을 고사시키니 결국 경쟁에서 탈락한 미국의 마이크론과 인텔 등은 일본 반도체 회사들을 전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함. 통상 무역의 저승사자이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ITC가 등판하며 일본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참교육이 시작됨.

 

그 결과 1986 7, 그 유명한 '·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됨. 일본산 D램 생산량을 강제로 절반으로 줄이게 하고, 50~200%에 달하는 고율의 상계관세를 골고루 때려 맞힘. 여기에 생산 회계 원가까지 미국에 전부 공개하도록 압박함.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강제로 D램 생산량을 감축당하자, 1987년부터 시장의 D램 가격이 급격히 폭등하기 시작함. 게다가 1985 9월 플라자 합의로 촉발된 초강세 엔고 현상까지 겹치면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시장 경쟁력을 무서운 속도로 상실하기 시작함.

 

1987년말부터 갑작스런 초호황 국면

공급뿐 아니라 수요도 우호적이었음. 인텔의 386 PC가 나오자 필요한 D램의 양이 이전 PC보다 폭증함. 게다가 가전의 디지털화 트렌드에 따라 가전에도 D램이 수요가 폭발함.

 

미국이 치트키를 써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을 골로 보내버림. 여기에 일본의 강제 감산과 초강세 엔고 현상까지 겹치자, 이는 삼성반도체에 단비 같은 대호재로 작용함. 당시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은 이미 차세대인 1M D램으로 완전히 넘어간 상황이었기에, 구세대 취급을 받던 256K D램을 전 세계에서 대량으로 뿜어낼 수 있는 유일한 회사는 사실상 삼성전자뿐이었음.

 

그 결과 1988년 반도체 시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초호황 국면에 진입함. 1988년 한 해에만 삼성전자 D램 사업에서 무려 3,200억 원의 흑자가 발생함. 1974년 창사 이래 삼성반도체가 쌓아온 누적 적자가 총 1,300억 원 규모였는데, 그해에 적자를 전부 메우고도 2,000억 원 가량의 돈이 남는 기적을 연출함. 1988 1, 삼성전자의 임원들은 기흥 3공장을 좀 더 일찍 착공하지 못하고 6개월간 눈치를 보며 미뤘던 것을 두고 두고 아쉬워할 정도.

 

단군이래 첫 세계 1.  

삼성이 1M D램을 처음 개발했을 당시, 미국과 일본의 내로라하는 선두 기업들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성공하며 선두 그룹을 턱밑까지 추격할 정도로 기술 격차를 무서운 속도로 좁혀감.

 

그리고 마침내 1992, 삼성전자는 일본의 경쟁사들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함. 동시에 같은 해에 일본 도시바를 넘어 전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1위에 등극하며, 명실상부 세계 반도체 기술을 가장 최전선에서 선도하는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됨.

 

이후 1994년에는 또다시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글로벌 시장에서의 독주 체제를 공고히 함. 사실 대한민국 기업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한 적은 그전에도 종종 있었음. 하지만 그것은 현대중공업의 조선업 사례처럼 선진국이 개척해 놓은 기존 산업 분야에서 '원가 경쟁력' '생산성'으로 밀어붙인 1위를 의미하는 것이었음. 인류 최첨단의 하이테크 영역에서 기술적 난제를 가장 먼저 돌파하며 글로벌 패러다임을 선도한 경험은 대한민국 역사상 삼성의 반도체가 최초였음.

 

호암을 추모하며..

삼성이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래 매해 문제만 일으키고 적자만 보던 반도체 사업이었으나, 이병철은 1982년부터 1983년까지 1년 넘는 시간을 철저한 검토에 쏟아부음. 결국 이병철은 미국 순방을 다녀온 직후 본격적인 VLSI급 투자를 결단하며 D램 산업에 전격 진출함. "일본의 독주는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에게 반드시 기회가 온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고 계속 연구하고 투자하라"며 그룹의 이익을 몇 년간 반도체에 통째로 쏟아부음.

 

어쩌면 1983년 당시 이병철은 미국 순방길에서 향후 벌어질 미·일 반도체 협정과 플라자 합의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미리 예견했을지도 모르겠음. 그 기회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의 삼성이 잡는다고 굳게 결심했을 수도 있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병철은 삼성 반도체의 극적인 흑자 전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채, 1987 11월 세상을 떠나게 됨. 그리고 같은 해 출간된 그의 회고록 《호암자전》에는 반도체 사업에 가졌던 포부와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전해짐.

 

언제나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는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냐.

그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을 무릎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ㅋㅋㅋㅋ 너무 길어지네 1부 끝. 2부는 다음에 언젠간. 1992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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