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3일 토요일

피 땀 눈물

 We are in the preliminary stage of one of the greatest battles in history.... That we are in action at many points—in Norway and in Holland—, that we have to be prepared in the Mediterranean. That the air battle is continuous, and that many preparations have to be made here at home.


I would say to the House as I said to those who have joined this government: "I have nothing to offer but blood, toil, tears and sweat". We have before us an ordeal of the most grievous kind. We have before us many, many long months of struggle and of suffering.


You ask, what is our policy? I will say: It is to wage war, by sea, land and air, with all our might and with all the strength that God can give us; to wage war against a monstrous tyranny, never surpassed in the dark and lamentable catalogue of human crime. That is our policy. You ask, what is our aim? I can answer in one word: Victory. Victory at all costs—Victory in spite of all terror—Victory, however long and hard the road may be, for without victory there is no survival.


Winston Churchill, 13 May 1940, Speech in House of common 


우리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투의 초입단계에 있습니다. 노르웨이와 네덜란드 등 많은 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고, 지중에서의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공중전이 계속되고 있고, 여기 조국에서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나는 이 정부에 합류한 사람들에게 말했듯이 하원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피, 수고, 눈물, 땀 외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가장 비참한 종류의 시련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길고 긴 투쟁과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다와 육지와 공중에서 우리의 모든 힘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암울하고 한탄스러운 인류 범죄의 목록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괴물 같은 폭군과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한 단어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숭라,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승리. 그 길이 아무리 길고 험난하더라도 승리.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원스턴처칠 1940년 5월 13일 하원 연설




2021년 10월 18일 월요일

BOB 다시 볼까 하는데..

 




Winters 중위가 부하가 보고하면 


"are you not uncertain?" 이라고 말할 것 같아서 못보겠다





2021년 10월 14일 목요일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는데 ...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하는데, 불확실성, 빠른 변화, 혁신, Obsolete Knowledge... 


 세상은 원래 빠릴 변했고, 과연 요즘의 변화폭이 그렇게 큰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처음 비행기를 발명한 사람과,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사람, 그리고 처음 달표면에 착륙한 사람은 같은 시대에 살았다. 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60년대 미국 영화를 보면, 핸드폰과 flat TV만 없을 뿐 생각보다 지금과 모습이 다르지 않다. 


 1,2차 산업혁명은 말 그대로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혁명이었고, 3차 산업혁명(정보화)를 동일 선상에서 산업혁명으로 볼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생산성의 측면에서) 


 1,2차 산업혁명에는 전기가 세상에 나왔고, 비행기가 나왔고, 대량생산한 자동차를 보통 사람들이 타고 다녔고, 말을 타고 다니던 귀족들이 내연기관을 탔다. 


 과연 작금의 모바일, 메타버스 같은 변화에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는 한지, 바꿔말해 지금의 불확실성과 변화가 정말 '혁명'이라는 단어씩이나 쓸 호들갑인지 잘 모르겠다. 


 아예 없던 무언가가 나와서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늘려야 한다. 자동차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혁명이지, 자동차의 에너지원이 석유에서 전기로 바뀐다는 것은 개선에 불과하다. 


 그런점에서.. 바이오가 갈길이 멀고, 데이터 사이언스로 만드는 자율주행? 자율주행이 정말 철도를 죽이는 날이 온다면, 그때 다시 얘기해볼 수 있을 것. 

2021년 10월 10일 일요일

외환위기와 그 이후의 한국경제 - 2부

1. 님하..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요약)


1997년 한국의 유동성 문제는 1980년대초 위기처럼 일본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 자국의 국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막았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전면적인 외환위기로 번지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을 IMF로 가게 해서 1) 전면적인 구조개혁 2)자본시장 개방을 요구하였고, 한국 정부 당국 역시 이 기회에 한국 경제의 오랜 구조적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한국은 기업부실채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였고, 여러 제도적 승격을 이루었다. 급격한 경제 제도 변화는 이후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기반이 되지만, 과소투자에 따른 1) 만성적인 저성장, 2)노동시장의 불안감 증대 3) 소득분배 악화 및 노동의 이중구조 심화 등 문제를 안는다. 10년후 2008년 미국발 GFC가 터졌을 때, 한국경제체제는 구조개혁과 자본시장개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환시장은 불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2. 모든 경제위기는 1가지

 대규모 대차관계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채권자가 채무자의 상환 능력을 의심해서 자금을 회수할 때 일어난다.

 

3. 무의미한 역사의 가정법.

[Case 1]미국이 동아시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넘어갔을 경우(1980년대 초처럼 일본의 도움으로 유동성 해결)

국내 금융위기는 불가피. 외환위기 이전 도산한 8대 재벌 외 몇 개로 추가 재벌 도산했을 것이므로 초유의 대규모 재벌 도산 사태는 불가피했곘지만, 한국은 구조조정으로 부실채권문제를 해결하면서 확장적 통화 및 재정정책으로 경제성장률 하락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

 

[Case 2] 한국이 미국과 IMF의 요구를 거절했을 경우

미국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정말 파국이 일어났을 것. 이 경우 모라토리엄이든 디폴트든 하게 되는데 ㅋㅋㅋ 동시기에 배짼 러시아를 보면 이해가 될 것. 국제 신용시장에서 거의 미아가 되고, 외화프리미엄도 엄청났을 것이고, 한국은 러시아와 달리 안보 문제까지 얽혀서 정말 상상하기도 싫네 ㅠㅠ

 

그런데 미국과 좀더 잘 협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1998년 후반이 되면 사실상 외환위기가 끝났고, 결국 유동성 문제만 해결했으면 길어야 1~2년 안에 끝낼 수 있는 문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4. 그렇다고 미국의 헤게모니가 나쁜 것이고, 우리가 반미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님.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이 미국 헤게모니의 성격이 한국에 불리하게 바뀌는 상황을 뼈아프게 경험했다. 하지만 미국의 헤게모니의 성격이 바뀌는 것보다 미국 헤게모니가 약화되는 것이 더 지옥일 것. 미국 헤게모니가 약화되면 세계가 20세기 전반에 경험했던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를 겪게 된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세계 질서에 빨리 편승해서 경제기적을 이루었고, 그 바뀌는 과정에서 대응하지 못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이후에 잽싸게 적응해 중진국의 함정을 피해서 선진국이 되었다. 미국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미국이 예전처럼 세계의 경찰국가를 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시 말해, 한국 국익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미국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한국이 미국과 친하게 지내며 그 헤게모니에 적응 협력 하는 것. 

 

5. 노태우 정부 200만호 건설 평가 : 갓태우

1980년에서 1987년까지 8년동안 정부는 inflation을 잡기 위해 긴축재정 시행하며, 주택투자가 부진(평균 6.5% 증가)

1980년대 중반 3저호황에 따른 유동성 확대 + 주택공급부족 = 주택가격 폭등

1988-1991년까지 평균 28.5% 증가

1) 서민뿐 아니라 중산층을 위한 전방위적 주택공급으로 수급안정

2) 주택건설정책 시행과정에서 재정적자가 없었음 (중요한 Point)

3) 주택난에서 오는 사회갈등 해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주택 안정화 달성

모정린 베리 와인거스트 200만호 건설이 포퓰리즘 성격이 있으며 이것이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 설득력 없음

 

6.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률 하락 이유 (이전이 과잉? Vs. 이후가 과소?)

(%)

1963-1979

1980-1997

1998-2007

2008-2016

경제성장률

10.6

8.5

4.9

3.0

1인당GDP증가율

8.4

7.4

4.3

2.5

1997년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8.5% 4.9%로 갑자기 반토막이났다. 1997년 이전 한국경제가 과잉성장을 했거나, 한국이 1998년 이후 한국이 과소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제민교수는 IMF 이후가 과소성장라는 견해에 손을 들어 줌.

경제성장요인 = 요소투입증가율(자본,노동 가중평균) + 총요소생산성증가율

1998년 이후 한국경제성장률이 저하 된 것은 요소투입증가율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 총요서생산성 증가율은 이전, 이후가 변화가 거의 없다. 즉 외환위기 후에는 저투자가 저성장을 가져오고 저성장의 결과 기업은 낮은 매출액 증가율을 기대해서 다시 투자를 적게하는 악순환.

 

 

7. 한국 재벌의 대마불사는 사실이 아님

한국에서 재벌이 대마불사한다는 대중의 인식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저이윤-고부채가 한도를 넘어가면 도산했고, IMF 이전에도 그랬다. 개별 재벌의 도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고, 기업자체가 아니라 소유주와 경영진이 퇴출되면서 정리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top class 기업이 몇 개 나왔다.

(논문도 있음)

 

8. 가슴이 웅장해지는 (국뽕) Point

한국은 자신의 상표와 기술력을 근거로 선진국 대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대기업을 육성했다는 점에서 산업화 역사상 일본 다음으로, 그리고 개도국으로서는 처음으로 성공했던 것이다.

민주정치와 경제성장간에는 2차 함수 관계. 즉 권위주의 정치는 성장률이 매우 높은 개도국과 성장률이 가장 낮은 개도국에서 나타나고, 민주정치는 그 중간에서 나타난다. (Seim and Parente 2013). 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주화를 하면서 경제성장률이 올라간 나라 (Prichett and Summers;그 로랜스 써머스ㅋㅋㅋ)

 

9. 이제민 교수의 view에 대해 여전히 남는 의문

반론까지는 아니고, 내가 완전히 그의 view를 수용하지 못하는 point가 있는데

과연 한국이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최선진국이 되었을 수 있을까?

외환위기 이전의 경제성장률이 이어졌으면, 수치상 2010년 정도엔 한국은 최선진국이 된다. 하지만 외환위기 한국경제 모델, 즉 대기업들의 고위험 저수익모델로 이것이 달성 가능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의 말처럼 1997년 한국 경제는 일시적인 유동성위기에 불과했고, 이것이 외환위기까지

과연 자생적 역량이 있었는가? 관성이 이게 가능했겠는가? 1980년대말 군사정권도 3저호황이 끝나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했는데, 90년 중-말 민주주의 정부가 이를 자생적으로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

대우그룹처럼 정부의 비호 아래 leverage를 높이 일으켜, 외환 spread를 먹는 business가 영원히 지속 될 수는 없는 일이다. IMF 처럼 극단적인 처방이 아니더라도, 한국 경제는 언젠가는 sustainable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저자의 주장처럼 일본의 도움을 받아 1997년을 넘겼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자체 문제를 개혁할 동인이 있었을까. 물론 IMF와 미국의 주문이 2008년 금융위기시, 효과가 거의 없는 처방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정도 level의 개혁이라도 자생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

 

10.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지속적인 경상수지흑자국

 But, 순대외자산이 그만큼 쌓이지 않음. 국제투자에서 순차익(net capital gain)이 마이너시이기 때문. 외국인이 보유한 한국 자산의 가격은 오른 반면 한국인이 해외에 투자한 자산은 오르지 않았다.

순차손의 규모는 IMF 이전 GDP 0.2%에서 GDP 2.3%로 증가

2016년까지 약 280조원 (inflation 반영시 360조원 수준)

사실상 국부유출

 

11.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Global Financial Crisis)

 글로벌 불균형으로 동아시아에서 유입된 자금이 미국 국내 금리를 끊임없이 낮게 유지해 줬다. (이건 미국의 책임이 큼. 1998년 한국에 잡도리 해갖고, 많은 흑자국들이 한국을 반면교사 삼아서 외환보유액을 끊임없이 쌓아 놓는 동인이 됨. 자기보험의 목적 )

 

1930년대 세계대공황처럼 되지 않은 이유: Fed이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이 엄청났음.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수단으로 불을 끔. 경제학의 본가 미국이 쌓은 내공력에 감탄 또 감탄. 그리고 중국이 비오는데 우산을 안 걷어 들임. 세계의 공장을 계속 돌리며 세계에서 유일한 소비.

 

 

12. 2008년 한국의 외환위기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못하지만 한국에는 10년만에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외환위기의 정의(Frankel-Rose) 신흥국 통화가치가 25%이상 하락하고, 통화가치의 절하율이 전년 절하율을 10%point 상회

이 정의에 따르면 2008년 한국은 외환위기였고, 외국인이 한번에 국내 주식을 팔고 나감. 근데 이때 외환위기의 원인은 외국인의 탈조선이 아니라 ㅋㅋㅋ 은행이 단기외채를 못 갚아서 발생했다. ??????? IMF 때 그 비싼 수업료를 내고 10년동안 처배운 것이 없음 ㅋㅋㅋ

IMF 이후 은행들이 뭘 했나 살펴보자.

1997년 외환위기 직구 정부주도로 대규모 인수합병하며 은행간 외형 경쟁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예대율이 올라갔다. 2004 100%를 넘어서서 2007년말에는 135.5% (예금 받은 돈보다 더 빌려줬다는 말. How? CD를 발행하거나 은행 채권 발행) 이 과정에서 은행들이 대규모 단기외채를 지게 되었다. (외화선물환 매입, 외화 대출) … 2008년에 유동성 위기 터지니깐 외환위기가 왔다.

 

IMF 이전

IMF 이후

한국의 은행들 영업형태

은행들은 재벌기업(이윤보다 성장 초점)을 지원하다가 부실채권을 떠안으면서 망함

은행간 외형성장 경쟁 (IMF이후로 재벌기업이 하던 짓 고대로 함)

 

 

결국, 정부가 나서서 2008 금융위기를 해결.

정부는 당시 한국의 외채는 외화선물환 매수 등 미래 수익에 기반을 둔 일시 차입으로서 외화 자산과 상쇄 되기 때문에 상환 부담이 없다.’라고 했는 개뻥었음. 당장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원인도 모름 ㅠㅠ

 

2008 IMF는 조건 없이 통화스왑을 한국에 제안함. 한국은 IMF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가 일었으므로, 아마 MB IMF 받을 수가 없었음. 민란 일어남. ㅋㅋㅋㅋ 그때 IMF랑 지금 IMF랑 달라요.”라 고 얘기했어도 이 말을 누가 믿겠음? 사실이긴 하지만 ㅋㅋㅋ

 

그래서 미국과 직접 swap 하면서 해결. 이때 미국은 GFC 원죄가 있어서 그런지 별 조건을 붙이지도 않았고, 한국은 덕분에 이때 잘 넘어감. 사실 동유럽 등 은 2008년 위기로 아주 나라가 골로 간 경우도 많음. 우리는 너무 무사히 넘겨서 감도 없지만.. 사실 2010년 이후는 90년대중반 이후 최대 호황까지 맞았으니 뭐..

 

 

13. 2008 GFC(Global Finance Crisis)에서 한국경제 대선방 원인

2009년 선진국들이 대폭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가운데, 한국만 유일하게 +0.7% 성장

 

이유1. 즉각 확장 거시 정책(GDP 4%) ; MB?

- 한국은 재정정책을 펼 여유가 있었음. 이건 노무현정부가 건전한 재정으로 넘겨줌 + MB 4대강 집착(이게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 유효수요유지에 큰 도움. 10여년 후 박근혜 정부가 재정건전화하면서 넘겨주고, 문재인정부가 파티하고 있음. 역사는 반복 공수가 바뀐 반복 ㅋㅋ

 



(여러분 제가 그립습니까? feat. 뭘 해도 어색한 형 ㅋㅋㅋ *source : YONHAP NEWS)

 

이유2. 2008년 외환위기에 따른 불황형흑자 발생

 2009년 실질실효환율은 2007년에 비해 38.9% 상승 ㅋㅋㅋ 무슨 위기만 나오면 형들이 Kospi 던지고 나가서 환율이 박살이 나서, 원화평가절하에 따른 수출 경쟁력 상승에 따른, 경기회복 (98년 외환위기에도 그럼)이 가능함. 이건 역설적이긴 하지만 KRW Hard Currency가 아니어서 누릴 수 있는 이점이다. 이웃나라 Hard Currency를 보유한 JPY를 보면 ㅋㅋㅋ 이건 뭘 대장성이 뭘 하려고 하면ㅋㅋㅋ 양놈들이 Yen Carry trade를 하기 때문에 폭망.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엔화평가절상 ㅋㅋㅋ 죽고 싶을거임 아주

암튼 이때 수출주 현대차의 주가가 5배뛰었고, 그걸 바탕으로 오늘날의 현차가 되었다는 레전설이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이유3. 중국경제와의 관계

 2008 GFC 발생 당시, 위기의 근원지 미국의 소비여력은 박살이 났고, 반대로 중국이 확장정책을 지속하며 세계의 소비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때 한국은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중국에 수출 쭉쭉하면서 성장. 이때 중간재 많이 팔았는데, 차화정 중 바로 화정이 여기서 꿀을 쭉쭉 빨았다고 볼 수 있다. (금호석화 주가만 봐도 ㅋㅋ)

 

14. GFC 이후 한국은 총수요 부족 디플레이션의 위기에 봉착

GFC 이후 중국의 성장감속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세계는 총수요 부족현상이 타나났다. 이건 한국 경제가 맞딱드린 수 많은 위기 중 처음으로 질적으로 다른 녀석이었다. 왜냐면 1960년대 이후 2013년까지 한국 경제의 침체 원인은 총공급능력의 문제로 발생하였지, 총수요는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 어떻게 만들어 어디에 팔까?만 고민하면 됐지, 안 팔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을 해본적이 없다. 2012 6월 이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한국은행 목표치 하한인 2.5%에 미치지 못하였다. 심지어 2013년 가계저축률마저 증가하며 디플레이션의 시대를 Open.

 

디플레이션 발생은 경제의 종말임: 기업과 가계는 소비와 투자를 안하고, 다시 물가 하락, 부채에 대한 부담이 증가 악순환. 심지어 채권자도 소비와 투자를 하지 않음. 채무자의 도산 가능성이 올라가기 때문에 지출을 줄임이러다 소멸하고 망함 (a.k.a. 일본병)

 

2012년부터 디플레이션의 늪이 보이자.. (사실 주택 명목 가격이 하락하는 것 자체가 디플레이션의 징후임) 2013년부터 한국정부는 추가경정예산 편성. 2014년에는 최경환의 초이노믹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확층 등으로 디플레이션을 막기위해 안간힘 쓰는 중.

 

1990년대 일본이 적극적 재정정책으로 디플레이션을 탈출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는 저출산이었다. 즉 지금 재정정책을 과다하게 쓰면, 후에 갚을 사람이 없다는 것. 한국은 근데 저출산이 일본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에 참 큰 문제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뭐..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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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민 교수님은 경제학과에서 <경제학설사> 등을 가르치셨는데, 물론 나는 안 들었지 ㅋㅋㅋ 강의는 재미없었을 듯; https://www.youtube.com/watch?v=XROfBRnkhmA

2021년 10월 7일 목요일

외환위기와 그 이후의 한국경제, 이제민 2017년 - 1부

  

1. 서론: 더 없이 소중한 한 권의 책


 아무리 한국의 저널리즘이 왜소하다고 하더라도, 97년 외환위기(a.k.a. IMF사태)를 조망하는 제대로 된 책 한 권이 없었다는 점은 절망적이었다. 이제민 교수가 <외환위기와 그 이후의 한국경제>를 내기 전까지는.

 

이로 인해 한국의 장삼이사들이 2008년 미국의 GFC(Great Finance Crisis)이 왜 발생했냐고 물어보면 Subprime mortgage CDS 등을 얘기하는 반면, 본인들 나라에서 일어난 97년 외환위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문제의 원인은 차지하고서라도 IMF가 여느 금융위기가 아니라 외환위기였다는 점도 자주 간과 된다.

 

이는 영화판에서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빅숏>에서 GFC의 원인에 대해 간명하게 설명하는 반면, 한국의 외환위기 20년 후 나온 <국가부도의 날> IMF사태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며, 국가기관이나 국제기구 등의 역할에 대해서도 오인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 입에서 디폴트를 검토하자.”라는 말을 할 때는 정말 ㅠㅠ

 

그리하여 제도권 경제학자가 우리 같은 장삼이사를 위해 외환위기 전반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양서를 냈다는 점은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은 것과 같다. 이 책이 나온지 4, 외환위기가 터진지 2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한 책은 de facto 유일하다. 

 

[Key Takeaways]

 

1. 한국 경제 모델: 위기로 점철된 지속 성장 (고성장 but 경제위기 빈번)


 2차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인 한국이 수출지향적 공업화 정책을 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수입대체공업화를 했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고,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한 숙명 중 하나가 외부의 바람에 취약. 국가 경제를 수출에 걸었으니, 옆집에서 기침을 하면 감기를 계속 걸리게 되는 구조다.

 

(참고) 수출지향적 공업화 vs. 수입대체 공업화

2차세계대전 이후 1940-50년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들은 자생적 3차산업을 할 수 있는 인프라가 허약했고, 원자재와 공산품을 수입하며 무역적자가 끊임없이 누적되었다. 이에 신생국이 경제발전을 하며 선택할 수 있는 모델이 2가지 있었는데, 1. 수입대체공업화 2. 수출지향적공업화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수입대체공업화를 선택해 망했고, 한국/싱가포르/대만/홍콩이 유일하게 수출지향적공업화를 선택하였다.

                                         

남미의 모든 나라가 수입대체공업화추진한 이유  

1. 개도국이 선진국에 수출 경쟁력이 있는 공산품을 생산하기 현실적으로 어려움

2. 한번 수입대체공업화를 채택하면 그 관성과 기득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움

3. 식민지배의 경험; 결국 제국주의열강(이후 선진국)에 공산품을 수출하면 정치적으로든 독립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종속 – “경제적 독립을 위해 선진국과 관계 끊자라는 국민적 정서

 

물론 한국도 독립 직후에는 에는 수입대체공업화를 선택하다가 이후에 바꿈. 처음에는 미국은 한국 원자재+ 1차 가공 -> 일본 완성품 -> 미국 수입. 구조를 구상했다가 후에 한국물건도 직접 사주는 것으로 바꿈.

 

2. 1998년 외환위기의 원인


1997년 당시 한국 상황: 거시경제적으로 의외로 괜찮았다. 이건 IMF도 인정하는 부분. 한국 경제 Fundamental이 튼튼해서 동남아 위기와 다르다.”라는 경제관료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반면, 한국은 미시경제적 문제가 있었다. 기업의 저이윤 고부채 경영이 만성적 부실채권을 낳고, 그것이 누적되면서 언젠간 터질 폭탄을 더 큰 폭탄으로 돌려막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자.


1. 1990년대 초반 YS의 문민정부가 등장하며, 재벌의 경제적 집중을 억제한다고 출자총액제한을 강화하고 은행대출을 묶었다. ㅋㅋ 그랬더니 재벌들이 제2금융권에서 차입했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재벌이 제2금융권에서 차입한 금액이 은행에서 차입한 금액을 넘어섬.  

 

2. 아무튼 재벌은 제2금융권으로부터 상업어음을 발행으로 장기투자 자금을 조달한다. 이 와중에 은행은 제2금융권에 수신경쟁에서 밀리게 되자, 신탁계정을 통해 재벌이 발행한 상업어음을 매입하며 파티에 참가한다.

...................

이게 아주 골때리는 거임. 단기차입금으로 장기투자를 하는 만기불일치(term mismatch)가 누적되며 돌려 막기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짐.

단기차입금으로 장기투자를 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개미가 빚내서 주식하는데 장투한다고 하고 있는 거임. 이러다 크게 물렸는데 빚 갚으라고, 더 연장 안 된다고 하면 개미는 한강가야 하는 거임. 그걸 재벌과 시중은행과 제2금융권 모두가 어깨를 걸고 하고 있었다.

 

3. 1997년이 되자 Party의 끝이 보이기 시작. 한보를 시작으로 대기업의 연쇄도산이 시작. 정부는 부도유예협약으로 연쇄도산은 좀 막아보려했으나, 이걸 들은 쩐주들이 뱅크런까지 시작. 이렇게 대규모 금융위기의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한보는 역시 정태수 회장님, 그리고 항상 정장에 흰 운동화를 신고 다니셨지... 사실 한보로 제일 유명한건 재건축계의 영원한 떡밥 은마아파트) 


4. , 그런데 우리가 1998년 위기를 금융위기라고 하지 않고, 외환위기라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은 국내금융위기로 시작했지만, 이를 수습하기도 전에 외환위기로 끌려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아직 외환위기까지는 아니고, 국내 금융위기 였다. (마치 2002년 카드채사태가 그랬던 거처럼 금융위기였다. 아직까지는…)

 

2. 그렇다면 이게 왜 외환위기로 비화되었나?


1. 1997년 대형 보험사의 도산 등 일본의 국내 금융위기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행들이 BIS 자기자본 비율 맞추기 위해 자금 회수. 이때 일본은행들이 무역신용이나 은행간 대출로 빌려주었던 단기자금도 갑자기 회수하기 시작했다.

 

2. 일본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자 한국의 은행들을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은행이 gg를 침.

 

3. 은행들이 gg치니, 정부가 나서 급하게 1997 8월 은행의 외채에 대한 지불보증을 해줌. 이게 신의악수였음(근데 또 그럼 은행 부도나게 냅둘 수도 없긴 함) 이제 외국의 빚쟁이들은 시중은행이 아니라 한국정부에게 빚을 갚으라고 찾아 옴. 근데 한국정부는 그걸 갚아줄 돈이 없었음. 정부가 GG. 이러면서 IMF로 가게 된다.

 

4. 정부는 은행의 외채를 대신 갚아줄 능력이 왜 없었냐?

 

일반적으로 정부가 외채를 갚아줄 능력이 없는 경우는 3가지임

1. 거시경제의 상태? 일단 한국은 이건 아니었음 GDP 대비 순외채나 경상수지 같은 거시경제지표는 당시 건전 (심지어 IMF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삼)

2. 재정건정성 여부? 우발채무가 있었나? 아님.. 이 것도 아님

3. 외환보유액? 정부의 유동성이 부족한 경우. 바로 한국이 여기에 해당함. 1997 9월말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단기외채의 40.9%에 불과.

4. 빚쟁이들이 찾아왔는데, 정부가 줄 돈이 없어서 GG à IMF

 

잠깐.. 이상한 걸 발견 하셨음? 말이 안되잖아. 외환보유액의 40%가 단기외채를 갚는데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외환보유액을 털어도 단기외채 커버를 못한다는 얘기임. 그럼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왜 이것밖에 안됐냐?


1996 OECD 가입하려고 무리하게 저환율정책해서 무역적자 봐서 특히나 낮긴 했는데, 원래 IMF 이전가지는 저렇게 외환보유고를 낮게 유지했었다. Marginal하게만 수십년 운용.


왜냐면 당시의 상식으로는 외환보유고를 낮게 유지하는 것이 최적화(Optimization)이다. 투자할 데가 많고, 수익율도 괜찮으면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것이 바보임. 최대한 땡길 수 있는 곳에 투자해야지. 그런 운용으로 경제를 수십년간 잘 성장해 온 것이고, 투자를 통해 버는 속도가 외채의 속도보다 더 빠르면 경상적자도 큰 문제가 안 된다. 일시적인 것이므로.

 

전문용어로 이를 동태적 최적화(Dynamic Optimization)이라고 한다. 자금을 빌려 투자함으로써 소비수준을 유지하고, 그 결과 장래에 늘어난 생산으로 과거의 빚을 갚는다. 1996-1997년 당시 경상수지적자는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그 적자를 단기외채로 매꾸고, 단기외채를 그 이상으로 땅겨서 해외투자를 하고 있었다는 것.

 

3. 결국, IMF 외환위기는 단기 유동성(liquidity)의 문제가 아닌가

 

이것이 이 책의 핵심 논점이다. IMF 외환위기 사태는 물론 한국재벌의 누적된 병폐, 정경유착 등으로 단기외채 무서운 줄 모르고 그거 땡겨다가 장기투자하고 앉아있는.. 한국 경제의 내적모순이 응축되어 폭발한 것이었겠지만, 1997년 당시 위기 자체는 Solvency의 문제가 아니라 Liquidity의 문제였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1997년 당시 단기외채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외화유동성을 공급했으면, 국내 금융위기 정도로 막을 수 있었다. 은행, 대기업 몇 개 부도나고 혼란은 있었겠지만.

 

앞서 말했듯, 한국의 경제구조 상 태생적으로 위기가 빈번하게 찾아온다. 우리의 Mofia 아저씨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간 여러 위기를 겪으며 나름의 탄탄탄한 Know-how를 갖고 있었음. 무슨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기재부 아저씨들이 정경유착해서 전횡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보면 행시재경직 pass하고 그 중에 해외 유학 다녀와서 박사 따고, 실무 열심히 하신 훌륭하신 분들임. (최소한 내가 아는 분들은 훌륭 ㅋㅋ)

 

 당시 기재부, 재경원 mofia 아저씨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냐? 이미 1980년대 초 약 15년 전에 비슷한걸 해봤고 그 방식으로 이 위기를 넘으려고 했다. 꺼림직한 과거가 있지만, 알고보면 혈맹. 21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믿음직한 한국의 파트너. 우리의 동반자 일본이 있었다. 1980년대초 외환위기를 그렇게 넘겼다. 일본에서 급하게 40억불 차관 받아서 넘김.


단기 외환을 빌려올 나라는 흑자충의 나라 일본밖에 없었다. 그리고 금융위기는 산불과 같은 것이어서 초반에 빨리 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므로, 일본 대장성을 위시한 일본 정부는 기쁘게 돈을 빌려줄 의사가 있었다. Mofia들 급하게 일본 출장가고 난리도 아니었으나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나서서 초기에 수습하겠다는 것을 저지하게 해서, 위기를 키워서 국가 경제를 사단을 내서 IMF로 가게 한 뒤, IMF 구제금융에서는 자금 제공조건으로 각종 경제개혁(과 자본시장 open)을 요구한다


그리고 한국이 실제로 외환위기는 IMF 구제금융(bail-out)이 아니라 채권의 만기연장(bail-in)을 통해서 해결. 그리고 1998년 하반기가 되자 한국의 실물경제와 별개로 외환위기는 사실상 종료되는 데 이 역시, 외환위기의 성격- solvency가 아닌 liquidity의 문제-의 방증이다.

 

그럼 1980년대 미국은 일본을 때려 한국을 도와주라고 하고, 15년 뒤에는 정반대로 일본이 도와주겠다는데도 막앗을까? 이건 YS의 외교 실패인데 ㅋㅋ 냉전의 존재 여부가 더 큰 요인이었을 것. 그리고 미국 헤게모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이 문 꽁꽁 닫고 미국에게서 단물만 뽑아 먹으려고 하면서 찍힌 당시의 상황 등등 때문이다. 한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미국과 무조건 잘 지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얻으며 너무 길어지니 오늘은 일단 마무리.

 

 

1979-1982 외환위기

1997 외환위기

한국

오일쇼크, 중화학공업 중복투자 등으로 단기 외화흐름 최악

한국은  전 최전방으로 미국 레이건-전두환 첫 회담. 일본이 동아시아안보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미국에 이름. 일본에 안보분담금요구하는 등 돈 내놓으라고 땡깡. ㅋㅋㅋㅋ

앞서 설명

한국은 11 2차례에 걸처 일본에 유동성 공급 요청

일본

스즈키 내각이 거절.

일본 정부는 한국의 유동성(외환보유액)부족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진단: 한국이 외환위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국익에 부합

미국

레이건 정부는 나카소네정부를 압박하여 한국에 차관

 

일본이 직접 한국에 유동성 공급 하려고 했으나, 미국이 안 된다고 함  

그러자 일본이 AMF를 만들어 한국에 유동성 공급하겠다고 해도 미국은 반대

 

미국 재무부 차관 로렌스 써머스가 일본 재무차관에게 밤12시에 전화해서 2시간동안 AMF 하기만 해보라고 욕함

결과

831월 일본 40억불 차관으로 외환위기 넘김

IMF 뚜둥

 

<국가부도의날>을 굳이 반미 프로파간다로 만들자고 했으면, 당시 주인공을 강만수 형으로 하고, 일본을 우리의 친구로 그렸어야 현실에는 더 맞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걸 개/가재/붕어들이 잘도 좋아했겠다. ㅋㅋㅋㅋㅋ 



혜수누님 자리에 만수형이 있어야 한단 말이오... 만수형 찾아보니 재드래곤 가석방될 때 같이 되셨네 

2부에서는, IMF 이후 한국경제의 체질변화, 2008년 금융위기(Global Finance Crisis), 한국경제성장률, 국뽕 moment 등등을 다뤄보도록 하자.

 

아무튼 넘나 재밌었어요. 이제민 교수님께 다시 감사. 압도적 감사.




 

2021년 10월 2일 토요일

스노볼 key takeaways

 어제 휴가 내고, 딱히 할게 없어서 워랜버핏의 생애를 담은 <snow ball>을 다시 다 읽었다. 1400 페이지라는 분량의 압박에도, 이건 정말 투자세계의 바이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인간의 생애가 전도서(Ecclesiates)의 반복인 것처럼, 투자인의 세계는 어쩌면 스노볼의 반복이 아닌가 싶다. 물론 스노볼이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워낙 많은 얘기가 담겨있어서 그런 측면이 있을 테지만… 


1. 버핏의 인간적 면모 

‘날개 달린 거 주식은 사는 거 아니다.’ 해놓고 기회만 되면 항공사 가고 손절.. 계속 항공사 사고 눈물의 손절. 코로나 때도 AA인가, UA인가 샀다가 또 손절.. ‘내가 이걸 또 사면 인간이 아니다.’하고 또삼. 

버핏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ㅋㅋㅋ


2. 코카콜라 투자

80년대 후반부터 코카콜라를 매집하기 시작함. 의외로 Coke의 valuation은 낮지 않았음. 하지만 버핏이 대량 매집했다는 소식이 들려지면서 Coke자체가 인기주가 되며 PER를 끊임없이 올리며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음. 2000년에 이르자 Coke의 PER는 40을 넘음. 전세계 음료 시장을 Coke가 100% 차지한다고 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Valuation. 하지만 버핏은 Coke팔지 않음.. 사실 못팜. 그가 팔면 다 따라 팔아서 똥값됨 


3. 장기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 = 타성 

종목에 대한 믿음이나, 다른 이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타성’임. 버핏은 가이코가 주당 2불로 폭락했을 때도 팔지 않았음. 너무 많이 사놔서 대주주여서 팔 수가 없었음. 그 물량을 받아줄 상대방이 없었음. (Coke도 마찬가지) 어쨌든 가이코는 부활해서 버핏을 세계 최대의 부자로 만들어 줌. 


4. n X 0 = 0 

핵전쟁이 발생할 확률이 10%라면, 50년간 핵전쟁이 발생할 확률은 99.5%임. 만약 핵전쟁이 발생할 확률이 1%라면, 50년간 핵전쟁이 발생할 확률은 40%임. 생각보다 큼. 


LTCM이 수행하는 투자 활동에서 입을 최대 손실폭은 20%였고, 그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1%였음. 즉 이런 투자 활동 50번을 하면 LTCM이 20%의 손실을 입을 확률은 40%였다는 말임. 버핏은 LTCM의 파산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함. 살로먼 브라더스 BOD할 때부터 존 매리웨더를 잘 알고 있었음. 


버핏은 LTCM이 파산하긴 할 거긴 할 건데… 수익모델 자체는 괜찮다고 판단. 하지만 20%하락하면 뒤지는 사업모델이었음. 그래서 버핏은 LTCM이 뒤졌을 때 그걸 통째로 먹어야 겠다고 생각. 빙하 보면서 놀고 있을 때 마침 파산해서, 골드만삭스랑 LTCM 통째로 먹으려고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위성전화가 잘 안 터져서 실패함. ㅋㅋㅋㅋㅋ 버핏은 100%만 사고 40% 이렇게 지분 팔꺼면 안 산다고 함. 결국 못 삼. 사실 LTCM이 유동성악화로 죽은 거니깐, 레버리지 작작 썼으면 안 망했을 거임. 


교훈은 레버리지를 모든 deal에서 쓰면 뒤질 확률이 100%에 가까워 진다. 라는 거임. 


갑자기 허영만의 타짜 3권인가? 4권에서 읽은 애기가 떠올랐음. 포커에서 돈을 못 따는 유형은 딱 3가지인데.. 

1. 뻥카를 안 치는 사람 2. 뻥카만 치는 사람 3. 뻥카치는 사람 잡겠다고 따라가는 사람 

투자에서 레버리지도 정확히 이런 역할이라고 생각. 투자에서 돈을 못버는 사람은 위의 말에서 뻥카를 레버리지로 바꾸면 됨. 


5. 1991년 빌게이츠와의 만남. 

컴퓨터를 전혀 몰랐던 버핏은 좀 배우고 싶어서 게이츠와 친구가 됨. 버핏이 게이츠보고 무슨 주식을 사야 하냐고 물어보니, 게이츠는 Intel과 MS를 추천.. 버핏은 거 안산걸 두고두고 후회. 

게이츠는 디지털 시대 코닥의 미래가 매우 암울하다고 설명. 그럼 컴퓨터 방송사도 암울하냐? 라고 물어보니, 게이츠는 방송사는 섹시하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면서 결국 사람들은 컨텐츠를 소비할 것이며 abc 같은 방송사는 수십년간 쌓아놓은 IP가 있지 않냐고 함. ㅋㅋㅋㅋㅋ 

 아.. 이걸 좀 일찍 다시 봤어야 됐는데.. 어? Youtube시대에 방송사 옛날 컨탠치 숏클립으로 만들어서 떼돈 벌고 있는데 ㅠㅠ abc를 sbs로만 바꾸면 되는거 아니냐 ㅋㅋ 아 킹받네 진짜 ㅋㅋㅋ6개월만 빨리 읽을 껄껄 껄무새 

 



6. 잡다구리한 버핏의 이면 

사실 버핏은 오래된 중형차 타고다니는 거로유명한데, 개인 private jet은 있음.  

80년대인가? 버크셔 헤서웨이 회장직을 큰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try함. 큰 아들은 별볼일 없었고, 대학도 마치지 못함. 딴 회사가 이런짓 하면 진짜 버핏은 자기가 가진 모든 채널을 이용해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왔는데… 시대정신이 내로남불인데 버핏은 30년전에 이미 실천하심. 



끝. 


우리는 국가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2024.12.13. Russell Napier 인터뷰 발췌 . 지금 봐도 놀랍네.. 번역은 번역기 시킴 ㅋ  Key takeaways  -------------------------------------- 역사적으로 30~40 년마다 통화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