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없어지기 전에 남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신이 이미 20여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도 변변한 기록도 없다.
아버지와 친척들의 구전,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내가 직접들은 이야기를 모아 할아버지의 인생을
정리했다. 구체적 연도나 세부적인 이야기는 틀릴 수 있지만 얼개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시작은 평범하게 가난한 집이었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금은 수원교도소 뒷동네가 된 수원
연무동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나에겐 증조할아버지)는 잔반의 후손으로 평생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 글만
읽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한량이었다. 증조할머니는 당시 꽤나 사는 집의 딸이었으나 “집안이 좋다”라는 잘못된 정보를 습득하여, 증조할아버지의 집에 시집을 왔다. 증조할머니는 평생 삯바느질, 남의 집 단기 알바 등으로 평생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증조할머니는 딸-딸-아들-아들 순으로 자식을 4명 낳았고, 우리
할아버지가 셋째 아들이다. 다같이 가난하던 시절이지만, 할아버지는
그 와중에 드럽게 가난한 집이었다. 비만 오면 물이 새고, 겨울에
옆집에 사람이 얼어 죽어 나가는 걸 보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가난이 평범하던 시절이라 할아버지의 인생도
매우 평범하게 흘러갈 뻔했으나, 할아버지에겐 운명을 거스를 만큼 소학교때부터 공부에 재능을 보였다.
물론 할아버지 집은 공부시킬 형편이 안 되었다. 할아버지는 소학교
내내 사과 상자를 책상으로 삼아 공부했다. 하루는 너무 추워 아궁이에 이 사과상자를 떼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기도 했다.
당시는 소학교가 의무교육의 끝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학교 졸업으로 학력을 마쳤다. 할아버지는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으므로, 중학교 진학을 원했다. 서울로 올라가 중학교 시험을 쳐서 무난히 합격했다. 문제는 중학교
등록금이 없었다는 점. 집안에서도 소학교를 마쳤으니 뭔가 돈을 벌어왔으면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중학교 입학금을 빌렸다. 물론
당시는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일일이 집을 찾아가 “안녕하세요. ~~인데요.”라고 하면 반가워하며, “그래 들어오너라. 그런데 무슨 일이니?” “제가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요.”라고 하면서 등록금 동냥을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에 공부를 하고 싶어 돈을 빌리러 친척집들을 전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딱하다. 할아버지는 몇 군데의 거절과 갹출을 통해 등록 마감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등록금을
마련했다.그 돈을 들고 중학교로 달려갔으나, 너무 늦게 도착해
학교의 불은 꺼져있었다. 할아버지는 가로등도 없는 그 밤에 굳게 닫힌 중학교 문을 잡고 엉엉 울었고, 한참을 울고 있다보니 당직 선생이 나와 자초지종을 듣고 등록을 받아줬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하며 혼자 일해서 학비 벌고 공부했다고 했다. 어디서
거주했는지는 모른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주야독경의 생활을 했다.
서울의대 합격
그 와중에 나라는 해방되었고, 할아버지는 대학입시를 쳤다. 할아버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하였다. 그때는 서울대 교복이
있을 때라 이걸 그렇게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서울의대생 할아버지의 고생도 끝이 보였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급하게
고향 수원에서 전보가 왔다.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일하고 오는 귀가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할아버지가 가보니, 할머니는 수원역 인근 기찻길에서 무단횡단을 하다
기차에 치여 즉사하였다. 게다가 열차운행에 방해가 되었다며 철도청(?)으로부터
꽤 많은 손해배상액도 청구되었다. 할아버지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오열했고, 백방으로 호소해봤으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얘기만 돌아왔다.
스무살의 고학생 할아버지는 억울하고 분해 견딜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마음에 몇날 밤을 분하게 지새운 후 할아버지는 법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할아버지는
법대로 전과를 했다. 할아버지의 목표는 2가지였다. 1. 법관이 되어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증조할머니의 억울함을 푸는 것. 2. 법관이
되어 당신처럼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휴머니즘. 할아버지가 법대생이 된 그 해 북한이
쳐들어 왔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6.25썰은 너무 길어서 이후에 다시쓰기로 하겠다. 할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이 죽었고, 첫째누나는 피난길 한강을 건너다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 실종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할아버지는 서울로 돌아왔고, 고시생이 되었다. 역시 신문돌리기, 가정교사 등을 하며 할아버지는 고시를 봤다. 할아버지는 27살까지 고시공부에 매진했으나 끝끝내 패스하지 못했으며, 할아버지는 고시를 포기하고 할머니와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물리적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초등학교때부터 20년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사에 죽을 각오로 달려왔고 늘 굶주림과 싸웠던 할아버지는 번아웃 되었다.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때 그때 고시공부했던 법전과 법교과서를 수십권 발견했다. 그리고 전보로 받은 1차 합격증,
답안지 연습장, 요약 노트 등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법관이 못 된 것을 아쉬워했고, 그 책을 노년까지 보관할정도로 미련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선생으로 사회진출
전쟁이 끝난 195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극빈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공무원이 되지 못하면 마땅히 취업할 곳도 없었다. 결국 공무원이 못 되면 엘리트들이 다음에 취업할
수 있는 곳은 은행이나 학교가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고향 수원으로 내려가 1956년 고등학교 영어선생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며 돈을 모았고, 아버지가 유치원을
가던 해 모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다. 은행을 다니며 그간 모은 돈을 모아 수원 북문로터리 중심가의 건물을
샀다. 이때 건물은 단층이었지만 로터리와 터미널이 있던 핵심 상권이라 다방, 슈퍼 등이 입점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오빠 그러니깐 할아버지의 매형에게
이곳의 다방을 세줬다.
가락동 땅 매입
할아버지는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한 성격덕에 은행에서 승승장구했다. 신규지점인
천호지점장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천호지점장을 하던 1969년의
일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가락동 과수원 주인이 할아버지에게 과수원을 매입해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송파구는 뻘과 과수원 밭이었는데, 할아버지는 1970년 가락동 땅 5만평(165m2)을
은행 대출을 끼고 500만원에 매입했다.
이 땅이 지금의 경찰병원 근처라고 한다.
<5만평이면 16만5천m2. 즉 헬리오시티로 옮기면 헬리오시티의 절반정도 되는 땅이다.>
1년 정도가 지났더니 어떤 업자가 나타나서 저 땅을 800만원 쳐줄 테니 자신에게 팔라고 해서 할아버지는 어차피 뻘과 망한 과수원땅 붙잡고 있어 뭐하나, 하고 판다. 1년만에 300만원을
번셈. 그걸로 녹번동의 신식 주택을 사서 이사간다.
당시의 최첨단 사업인 물티슈 공장 건설
할아버지는 이후 종로 지점장을 지냈는데, 지점에서 횡령사건이 발생해
지점장을 그만 두고 나오게된다. 가락동 팔고 남은 돈과 퇴직금을 모아 무엇을 해볼까? 고민하던 할아버지는 녹번동 집을 담보로 당시에 최첨단 사업인 물티슈 공장을 마포에 차린다. 1972년의 일이다.
녹번동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일본에서 기계를 사들여서 마포에 물티슈 공장을 지었다. 두루마리 휴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물티슈라는 재화를 못 본 사람이
국민의 대다수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종로지점장을 하며
거래처와 시내의 음식점을 다니다 일제물티슈를 보았고, 이를 국산화하여 여러 음식점에 납품하면 필시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점 주인에게 물티슈가 왜 들쭉 날 쭉 하냐고 하니 일본에서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공장을 짓고, 이제 생산을 좀 해보려는 1972년 여름.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태풍 베티를 동반한 사상
최악의 폭우가 서울을 덮친다.
<출처 동아일보, 서울 지역에 이틀동안 400mm의 폭우로 대부분의 지역이 침수됨>
할아버지의 인생을 건 도전. 물티슈 공장은 물티슈 한장 찍어보지 못하고
기계가 물에 홀딱 잠기고 수해에 유실되어 망했다. 할아버지는 녹번동 집에서도 쫓겨났으며 할아버지의 식구들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내 앉는 신세가 되었다.
할아버지네는 6가구가 한집에서 사는 전셋집으로 이사갔으며 6식구가 방2칸짜리 작은 집에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물론 화장실은 야외에 있었고, 그 화장실을 할아버지를 포함한 6가구가 썼다. 녹번동 신식 양옥집에 살았다 하루아침에 전셋집으로 나락.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날마다 싸웠다고 한다.
다시 구직활동
할아버지는 다시 구직활동에 나섰다. 할아버지의 서울대 법대 친구들도
나서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여기 저기 구직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때마침 일본의 T전자회사가 경남 마산에 공장을 지었고, 할아버지가 여기 현지인 공장장으로 낙점되어, 마산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마산에서 자취하고, 할머니와 아버지 고모, 작은아버지 등등은 서울 그 전셋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중학교 때
일이다. 할아버지가 T전자 공장장 1년만에 빠르게 가세를 키워, 다시 아버지는 그 전셋집을 탈출해 역촌동
서부병원 뒤의 양옥집으로 이사갈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대학교때 까지 T전자 공장장으로 일했고, 가세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을 할
때 모아 사뒀던, 수원 북문 로터리의 건물들이 오랜 송사를 겪었는데,
이때 즈음 할아버지가 최종 승소하며 수원건물을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니들은 앞으로 여기서 월세 받고 살거라. 우리집안은 이제 걱정없다.”라고 대학생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얘기했다고 한다.
반월공단에..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의 서울대 상대 후배가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이
후배는 한국 최고의 재벌기업의 가장 잘 나가는 계열사 ‘종합상사’를
다니고 있었다. 회사에서 텐트를 수출하는 일을 하는데, 선배님이
수원에 땅과 건물이 있다는 걸 들었다. 그거를 팔고 반월공단에 텐트 공장을 지어 납품하시라. 라고 동업제안을 했다.
할아버지는 또다시 번뇌했다.
1980년대초 종합상사는 붐을 타고,
외화를 벌어오는 역군이었고, 주변에 종합상사의 벤더가 되어 큰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차피 월급쟁이 공장장의 미래도 불확실하고, 일본에게
한국이 생산기지로써의 매력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21억원에 수원 로터리에 있는 건물을 팔아버리고 (현재는 고층 빌딩이 있는 자리임) 반월공단에 텐트공장을 인수하여, 텐트 납품 사업을 시작했다. 공순이 300명이 일하는 나름 큰 공장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처음에는 잘 됐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일본 전자회사의
자회사 공장장을 해본 것이지, 직접 물건을 만들어서 경쟁해서 한국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해본 공장장을
해본 것은 아니었다.
이 공장의 문제점은 인력수급이었다. 공순이를 서로 뺏고 뺏기는 일이
빈번했다. 게다가 대기업 종합상사의 갑질이 상상 이상이었고, 여러가지
일이 겹치며 할아버지는 결국 3년만에 모든 것을 날리고 나왔다.
물론 1980년 수원의 건물을 팔고,
그 21억원을 다 공장을 짓는데 사용한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남은 돈으로 새로운 집을 샀다. 그때 고민했던 것이 1. 논현동
단독주택(MB 살던데 근처) 와 2. 방배동 대형 평수의 최신형 아파트였다. 할머니는 방배동 아파트를
보고 와 그 당시의 최신식 아파트의 구조에 감명받았다. 물론 이때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디로 갈까
몇 달을 고민했다고 한다. 아파트에 살아 본 일이 없고, 주위에서
아파트 생활의 쾌적함을 노래하던 때라 할아버지는 방배동 60평 아파트로 최종 결정했다. (사실은 할머니가 결정)
<논현동 1985년, 출처: https://m.blog.naver.com/telience92/221574700365>
할머니가 사려고 했던 집은 현재 논현역 사거리 우리은행 건물이 되었다.
반월공단에서 사실상 전재산을 날린 할아버지는 다시 빈털털이로 나왔으나, 이번엔
사정이 좀 났다. 방배동에 아파트도 있었고, 애들은 다 대학에
갔고, 반월공단 사장할 때 타던 각그랜저도 있었다. 암튼
다시 먹고 살아야하니 할아버지는 새로운 일을 알아봐야 했다.
마지막 도전
1980년대 중반. 아버지는
결혼해서 출가했고, 할아버지의 나이도 이제 50대를 지나
환갑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는 남자 기대 수명이 60이
될랑 말랑 하던 시절이라 할아버지도 인생의 마지막 도전을 남기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전자회사를 하던 사람들 만나러 일본 출장을 가고, 또
나름 한국 종합상사 인맥을 활용해서 사업 아이템을 물색했다. 할아버지의 결론은 한국의 고급 농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
할아버지는 작은 무역회사를 차리고, 한국의 새조개, 송이버섯을 일본에 수출했다. 나중에는 중국산 영지버섯을 공수해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이것도 꽤 잘되며 할아버지 역시 부활했다. 88서울
올림픽을 할 즈음인데, 할아버지의 회사는 승승장구하여 삼성동 무역센터 38층?에 자리잡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 회사에 가끔 놀러갔는데, 할아버지가 코코아를 타줬다. 아니, 정확히는 여직원을 시켜 코코아를 타오라고 했다. 당시 할아버지 사무실에서 서울시내가 다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높은데
살아야 하는구나를 어렸을 때 깨쳤다.
문민정부가 들어오고, 얼마 안가 원화 절상 등의 이유로 일본에 농수산물을
수출하는 일이 어려워졌고, 할아버지는 50대 후반의 나이로
모든 일을 접었다. 물론 60대 때도 뭔가를 항상 하셨다. 할아버지는 고시를 보면서 몸이 너무 망가져 이후 철저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엄청나게 건강하셨다. 모두들 할아버지가 100살까지 사실거라고 했지만, 70대 초반 갑작스러운 사고로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친구들은 잘나갔다.
할아버지의 서울법대 동기들은 5공 육법당의 핵심 of the 핵심이었다. 대법관, 검총
등은 물론 장관도 여럿 있었다. 고시 패스한 사람 중에 기관장 못해본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고시를 패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다. 할아버지의
법대 동기 중에 가장 잘 나갔던 사람은 5공의 후계자로도 물망에 올랐던, 5공 테크노크랏의 화신 노신영 총리다.
<노신영 전 총리 출처: 연합뉴스>
이 할아버지들은 60줄이 넘어 은퇴한 후 매달 만나고, 1년에 1-2번 부부동반 모임을 했는데 할머니가 여기만 갔다오면
“당신은 고시도 패스 못하고 뭐했냐?”고 온갖 성질을 부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인생은 아쉬움 투성이다.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는
무탈하게 서울의대 나온 의사로 큰 고생하고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돈도 더 많이 벌고, 그 시절 서울의대 나온 의사니 최소한 어디 병원장은 했겠지. 이길여
박사만큼은 못됐을 지라도 암튼 아쉽다.
그 시절 사법고시에 붙었더라면?
그게 아니라면 가락동 땅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면 또 어땠을까? 헬리오시티의
반이 우리집 껀데… 가락동이 개발될 때 조금씩 잘라가며 팔았어도, 지금
우리집은 수천억대 부잣집이었겠지.
1972년 서울에 대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님 할아버지가 1년만 빗겨서 1973년에
물티슈 사업을 구상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말짱히 전란이후에 샀던 수원 북문의 빌딩은 뭐하러 팔았나? 이거
지금 수백억인데.
그래.. 그것도 아니라면 방배동 아파트가 아닌 논현동 사거리 주택을
샀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수원 북문 빌딩보다 논현동 빌딩이 지금 더 비쌀 거 같은데.
다 지나간 일이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아니겠는가? 다만, 할아버지가 인생을 스쳐간 노다지의 하나만 잡았더라도 우리 아버지는 우리 엄마랑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세상에 없었겠지 ㅋㅋㅋㅋ 다 못나가서 평범한 우리 엄마랑 결혼.
까놓고 말해, 우리 할아버지가 동시대의 또래보다 못 살았나? 그건 아니다. 너무나 대박인 기회들을 허망하게 날려서 그렇지. 할아버지는 서울대 법대 나와서 꽤 부유하게 애들 키우며 잘 사셨다. 1920년대
생 중 상위 10% 정도는 되는 삶 아니었을까? 이렇게 삽질을
했는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은 “꺾이지 않은 마음.”이다. 할아버지라고 회환과 후회가 없었겠는가? 손절 타이밍한번 못 잡아서 두고 두고 후회하는 나의 성격을 볼 때 나의 인생에 위에 나열한 하나만 있었어도
나는 그 아쉬움의 노예가 되어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늘 도전했고, 지난 일은 잊고 다시 다음을 준비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을 때면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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