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8일 월요일

요즘 딸 친구들 이름 보니

 ~엘 이라는 이름 많더라. 라엘 다엘 소엘.. 이런 식으로 


<순위를 보면 꼭 드러지도 않은데> 


약간 너무 무근본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부모 마음이지 뭐. 

자기 자식 이름 어떻게 짓든... 남의 이름까지 고깝게 생각하는 태도는 곧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고개를 들어 북녘땅을 보라! 


RFA에 따르면, 함경북도의 한 북한 주민은 “요즘 당국이 주민들에게 ‘사상성’이 없는 주민들의 이름을 사법기관에 찾아가 바꾸라고 지시했다”며 “개인의 이름을 국가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게 바꾸라고 강제하는 것이어서 주민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지난달부터 인민반별 주민회의에서 ‘받침이 없는 이름을 전부 고치라’는 통보가 연속적으로 내려지고 있다”며 “올해 말까지 받침이 없이 지은 이름들은 다 정치적 내용을 담아서 ‘혁명적’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도 전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과거에는 북한에서 ‘충성’과 ‘일심단결’에서 따온 ‘일심’ ‘충심’, ‘충성’과 ‘총폭탄’ ‘결사옹위’에서 따온 ‘총일’ ‘폭일’ ‘탄일’ 등을 이름으로 많이 썼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주민들의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아리’ ‘소라’ ‘수미’ ‘가희’ 등을 이름으로 많이 쓰고 있다고 한다. 이런 “받침 없이 단순하게 지은”이름에 대해 북한 당국이 “반사회주의적이며 사대주의적”이라며 이름을 고칠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2/11/29/U6FZOFYJC5AZ5PY76OZKZHTI2E/


진짜 주접 싼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2년 11월 26일 토요일

안톤 에고, 라따뚜이

Pixar의 이 애니메이션은 결국 안톤 에고의 독백을 위한 build-up으로 이해 






"In many ways, the work of a critic is easy. We risk very little, yet enjoy a position over those who offer up their work and their selves to our judgment. We thrive on negative criticism, which is fun to write and to read. But the bitter truth we critics must face is that, in the grand scheme of things, the average piece of junk is probably more meaningful than our criticism designating it so. But there are times when a critic truly risks something, and that is in the discovery and defense of the new. The world is often unkind to new talent, new creations. The new needs friends." 


“음식평론가 일은 여러모로 쉽습니다. 우리는 별다른 위험 부담 없이,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으려는 요리사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즐기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을수록 인기를 끕니다. 부정적인 평론은 쓰기도, 읽기도 재밌습니다. 하지만 우리 평론가들이 직면해야 하는 냉혹한 진실이 있습니다. 극히 평범한 쓰레기 음식일지라도 음식 평론가의 글보다 더 의미있다는 진실입니다. 평론가가 진정으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옹호하는 순간입니다. 세상은 종종 새로운 재능, 새로운 창조물에 불친절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지지해줄 친구가 필요합니다.” 


다카다 겐조 X 마수나가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

언어를 구성하는 형태와 내용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음. 


의성어나 의태어는 부분적으로 필연성이 있는 것 같지만 고유명사로 가면 더더욱 언어의 자의성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가끔은 반례 같은 착시가 등장한다. 즉 이름과 내용에 필연이 있다는 착각이 든다.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지식인의 역할과 썩 잘어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 이름이 곧 문학이고, 니체(Nietzsche)는 그 퉁명스러운 스펠링마저 차가운 철학자가 되기에 너무나 적절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겐조라는 이름은 어떤가? 그리고 이를 알파벳 KENZO라고 쓴다면?





이는 썩 패션 브랜드로 쓸만한 이름이 된다. 


다카다 겐조(高田賢三)는 어쩌면 이름부터 패션을 위해 태어난 사내였다. 다카다가 성이고 겐조가 이름이다. 한국에서 ‘고현삼’같은 이름으로 태어났다면, 현삼을 브랜드로 쓰기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겐조는 1939년생이다. 20대에 파리로 건너가 패션을 공부하고, 31살이 된 1970년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 KENZO라는 이름을 딴 가게를 연다. 겐조의 옷은 곧 바로 elle에 표지에 실리며 이후 승승장구한다. 




고흐의 재림?


빈센트 반 고흐는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몇 점 남겼다. 서양의 화풍으로 일본의 느낌을 재현했다고 볼 수 있는데, 겐조도 그랬다. 그 대상이 회화가 아니라 의상이었던 것. 그리고 겐조는 진짜 일본인이었다는 점 정도가 다르겠지만. 그 둘의 시선은 10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포개진다.


<left: 고흐가 그린 일본 여인 1887년, right: 겐조 1980년대> 


다카다 겐조는 MIX를 아는 디자이너였다. 프랑스 패션의 '문법'에 일본어 '단어'를 요리 조리 끼워 만드는 '문장'을 만드는 것에 능하였다. 다카다 겐조가 즐긴 소재는 꽃이였고, 이 꽃은 어지러울정도로 현란하게 그의 옷을 수 놓았다. 유럽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동양의 미를 훌륭히 stereotyping하였고, 이는 어찌보면 한국의 군부독재시절 '왜색'이라 금기한 일본스러움의 총화였다. 


다카다 겐조는 1993년 LVMH에게 자신의 브랜드 Kenzo를 8천만불에 매각했다. 당시 겐조의 1년 매출이 1천5백만불 수준이었으니 괜찮은 exit였다. 1993년 8천만불이면, 1천억원 정도 되는 돈인데, 지금도 큰 돈이지만 당시에는 더 큰 돈이었다.


 

<마아파트가 2.2억 정도 하던 시절이고, 10배가 뛰었으니깐 ㅋㅋㅋ 한 1조 받고 패션브랜드 팔았다고 봐도 될듯???ㅋㅋㅋㅋㅋ>


50대의 겐조는 1999년까지 LVMH의 Kenzo를 위해서 일하고 은퇴하였다. 


노년의 겐조는 자신의 이름을 쓰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디자인 활동을 이어간다. 90년대 초반 8천만불이라는 큰 돈을 받고 브랜드를 팔았음에도, 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까지 팔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겐조는 이후 LVMH와 몇번의 Kenzo 상표권 분쟁을 한다. 조 말론이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회사를 매각한 후 향수 사업을 못하는 것 처럼, 겐조도 그랬을 텐데, 1993년 계약의 범위가 모호했거나 아니면 당시에 고려하지 못했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Kenzo와 다카다 겐조의 상표권 분쟁이 있었고, 다카다 겐조가 일부 승소하기도 하고, 패소하기도 한다. 


LVMH가 겐조의 한자 이름 賢三을 쓰자, 겐조는 자신이 판건 Kenzo 뿐이라고 소송해서 이건 이긴다. 


일부 승소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카다 겐조는 Kenzo를 매각한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패션사업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천억정도 버셨으면 좀 쉬시지...




안경 디자이너로 부활 


겐조는 2014년부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 브랜드인 Masunaga와 협업하여 Masunaga 브랜드의 상위 트림을 내놓고 있다. 


 


<자신이 디자인한 안경을 쓴 노년의 겐조> 


 그리고 안경에는 겐조 가문의 상징 도라지 꽃을 그려 넣는다. 겐조하면 역시 꽃이다. 그를 키운 건 8할이 꽃이었으니깐, 겐조 플라워라는 향수도 있고, 호랑이가 나오기 전에는 꽃을 잔뜩 그린 옷으로 출세했으니깐. 


<겐조 하면 역시 꽃무늬> 

<겐조는 자신의 상징 도라지 꽃 문양을 새긴 안경을 내놓는다> 


 다카다 겐조는 Masunga X Kenzo Takada 라는 브랜드를 사용해서 안경을 팔았다. 이때 겐조 다카다라는 자필 서명을 영문으로 박았는데, 어지간히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겐조인지 알 수 없다. LVMH와 상표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몸부림친 흔적이 보인다. 


 안경점에서 안경사들이 안경을 팔 때, "겐조 아시죠? 그 겐조가 마수나가랑 손 잡고 직접 안경을 디자인 한 상위 라인인데요." 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LVMH의 Kenzo와 마찰이 있었는지 언제가부터인가 슬그머니 Masunaga K-3로 이름을 바꿨다. Kenzo Takada 라는 이름마저 숨긴 채. 



<아마 이 또한 상표권 분쟁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K-3가 뭐냐? 기관총인가? 기아차인가? 자신의 이름을 8천만불에 팔고 겐조는 계약을 피해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몸부림 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팔지 말지. 아님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엑시트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창업자의 사정이 있었겠지. 


2020년 겐조가 코로나19로 프랑스에서 사망하면서, 이제 생물학적 존재로서 겐조가 직접 디자인하는 물건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 Masunaga에서 나오는 안경도, LVMH에서 나오는 Kenzo도 그리고 이 둘 뿐만 아니라 그가 손댔던 수 많은 상표들에서도, 그가 불어 넣은 호흡을 달고 매년 새로운 컬렉션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다카다 겐조의 명복을 빌며. 








2022년 11월 13일 일요일

윤하, 시간의 지평선

 윤하의 '시간을 달려서'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윤하는 원래 일본에서 먼저 데뷔했다. 2006년 18살 때 윤하의 도쿄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인간 극장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윤하의 노래는 상당히 일본 시티팝스럽다. 처음에 일본에서 활동을 해서 그런지 내내 청량한 일본 노래 느낌이 드는데, 이것이 최근의 젊은이들에게는 신선하게 들리나 보다. 


K-POP이 J-POP을 1~20년 lagging해서 들여오면 흥행필승하던 시절이 있었다. 1990-2000년대는 그랬다. 마징가 제트, 짱가, 축구왕슛돌이, 피구왕통키를 보며 큰 아이들은 일본의 대중문화와 코드가 맞았다. 


통신이 그렇게 발전하지 못한 8~90년대는 일본 노래를 걍 표절해왔으며, 90년대 후반이 되고 DJ가 일본문화개방을 선언하자, 한국의 프로듀서는 검증된 일본 노래를 돈주고 사와서 히트를 시킨다. 


1. I love you. 포지션(2001), 오자키 유타카(1983) 





2. 오 마이 줄리아. 컨츄리꼬꼬(2000) 체커스 (1984)




이랬던 것이 최근 강창일 前 주일대사의 인터뷰를 보면 일본의 2~30대가 한국을 '문화대국'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62/0000016035?cds=news_edit
 

문화대국이라니 ㅋㅋㅋ 한국 대중문화 자체가 일본의 아류로 시작했는데... 


하긴 일본의 사나가 한국어 배워서 트와이스로 데뷔했으니깐. 사나의 샤샤샤와 치즈김밥이 어느덧 5~6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국가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2024.12.13. Russell Napier 인터뷰 발췌 . 지금 봐도 놀랍네.. 번역은 번역기 시킴 ㅋ  Key takeaways  -------------------------------------- 역사적으로 30~40 년마다 통화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