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
언어를 구성하는 형태와 내용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음.
의성어나 의태어는 부분적으로 필연성이 있는 것 같지만 고유명사로 가면 더더욱 언어의 자의성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가끔은 반례 같은 착시가 등장한다. 즉 이름과 내용에 필연이 있다는 착각이 든다.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지식인의 역할과 썩 잘어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 이름이 곧 문학이고, 니체(Nietzsche)는 그 퉁명스러운 스펠링마저 차가운 철학자가 되기에 너무나 적절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겐조라는 이름은 어떤가? 그리고 이를 알파벳 KENZO라고 쓴다면?
이는 썩 패션 브랜드로 쓸만한 이름이 된다.
다카다 겐조(高田賢三)는 어쩌면 이름부터 패션을 위해 태어난 사내였다. 다카다가 성이고 겐조가 이름이다. 한국에서 ‘고현삼’같은 이름으로 태어났다면, 현삼을 브랜드로 쓰기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겐조는 1939년생이다. 20대에 파리로 건너가 패션을 공부하고, 31살이 된 1970년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 KENZO라는 이름을 딴 가게를 연다. 겐조의 옷은 곧 바로 elle에 표지에 실리며 이후 승승장구한다.
고흐의 재림?
빈센트 반 고흐는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몇 점 남겼다. 서양의 화풍으로 일본의 느낌을 재현했다고 볼 수 있는데, 겐조도 그랬다. 그 대상이 회화가 아니라 의상이었던 것. 그리고 겐조는 진짜 일본인이었다는 점 정도가 다르겠지만. 그 둘의 시선은 10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포개진다.
다카다 겐조는 MIX를 아는 디자이너였다. 프랑스 패션의 '문법'에 일본어 '단어'를 요리 조리 끼워 만드는 '문장'을 만드는 것에 능하였다. 다카다 겐조가 즐긴 소재는 꽃이였고, 이 꽃은 어지러울정도로 현란하게 그의 옷을 수 놓았다. 유럽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동양의 미를 훌륭히 stereotyping하였고, 이는 어찌보면 한국의 군부독재시절 '왜색'이라 금기한 일본스러움의 총화였다.
다카다 겐조는 1993년 LVMH에게 자신의 브랜드 Kenzo를 8천만불에 매각했다. 당시 겐조의 1년 매출이 1천5백만불 수준이었으니 괜찮은 exit였다. 1993년 8천만불이면, 1천억원 정도 되는 돈인데, 지금도 큰 돈이지만 당시에는 더 큰 돈이었다.
<마아파트가 2.2억 정도 하던 시절이고, 10배가 뛰었으니깐 ㅋㅋㅋ 한 1조 받고 패션브랜드 팔았다고 봐도 될듯???ㅋㅋㅋㅋㅋ>
50대의 겐조는 1999년까지 LVMH의 Kenzo를 위해서 일하고 은퇴하였다.
노년의 겐조는 자신의 이름을 쓰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디자인 활동을 이어간다. 90년대 초반 8천만불이라는 큰 돈을 받고 브랜드를 팔았음에도, 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까지 팔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겐조는 이후 LVMH와 몇번의 Kenzo 상표권 분쟁을 한다. 조 말론이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회사를 매각한 후 향수 사업을 못하는 것 처럼, 겐조도 그랬을 텐데, 1993년 계약의 범위가 모호했거나 아니면 당시에 고려하지 못했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Kenzo와 다카다 겐조의 상표권 분쟁이 있었고, 다카다 겐조가 일부 승소하기도 하고, 패소하기도 한다.
LVMH가 겐조의 한자 이름 賢三을 쓰자, 겐조는 자신이 판건 Kenzo 뿐이라고 소송해서 이건 이긴다.
일부 승소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카다 겐조는 Kenzo를 매각한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패션사업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천억정도 버셨으면 좀 쉬시지...
안경 디자이너로 부활
겐조는 2014년부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 브랜드인 Masunaga와 협업하여 Masunaga 브랜드의 상위 트림을 내놓고 있다.
<자신이 디자인한 안경을 쓴 노년의 겐조>
그리고 안경에는 겐조 가문의 상징 도라지 꽃을 그려 넣는다. 겐조하면 역시 꽃이다. 그를 키운 건 8할이 꽃이었으니깐, 겐조 플라워라는 향수도 있고, 호랑이가 나오기 전에는 꽃을 잔뜩 그린 옷으로 출세했으니깐.
<겐조 하면 역시 꽃무늬>
다카다 겐조는 Masunga X Kenzo Takada 라는 브랜드를 사용해서 안경을 팔았다. 이때 겐조 다카다라는 자필 서명을 영문으로 박았는데, 어지간히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겐조인지 알 수 없다. LVMH와 상표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몸부림친 흔적이 보인다.
안경점에서 안경사들이 안경을 팔 때, "겐조 아시죠? 그 겐조가 마수나가랑 손 잡고 직접 안경을 디자인 한 상위 라인인데요." 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LVMH의 Kenzo와 마찰이 있었는지 언제가부터인가 슬그머니 Masunaga K-3로 이름을 바꿨다. Kenzo Takada 라는 이름마저 숨긴 채.
<아마 이 또한 상표권 분쟁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K-3가 뭐냐? 기관총인가? 기아차인가? 자신의 이름을 8천만불에 팔고 겐조는 계약을 피해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몸부림 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팔지 말지. 아님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엑시트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창업자의 사정이 있었겠지.
2020년 겐조가 코로나19로 프랑스에서 사망하면서, 이제 생물학적 존재로서 겐조가 직접 디자인하는 물건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 Masunaga에서 나오는 안경도, LVMH에서 나오는 Kenzo도 그리고 이 둘 뿐만 아니라 그가 손댔던 수 많은 상표들에서도, 그가 불어 넣은 호흡을 달고 매년 새로운 컬렉션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다카다 겐조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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