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3일 금요일

부비동염(Acute sinusitis) 투병기- 2부 feat. 용산성모이비인후과 (2020. 8)

1. 병원은 용산대로에 있었고, 동네는 재개발이 한참이었지만 그 병원 건물은 625 이후 용산에 건물이 들어서던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2. 병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건물의 외관은 물론 건물의 인테리어도 수십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의사는 2명이 있었다. 한 분은 60대 중반을 넘긴 것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의사와 다른 한분은 4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둘 다 연세의대 박사였으며, 세브란스 외래교수라고 했다. 



3. 진료실로 들어가서 60대 중반을 넘긴듯한 할아버지 의사를 만났다. 선생은 50년은 된 거 같은 환자의자에 나를 앉히고, 반사경을 이마에 두르고(와.. 이건 몇 년만에 보는 거냐?) 수십년이 된듯한 집기로 나의 코를 찬찬히 들여봤다. 선생은 “코가 많이 있네요.”라고 하며 썩션을 했는데, 길다란 데롱을 여러 개 바꾸며 나의 코 깊숙한 곳에서 고름을 빼냈다. 기구는 세월을 먹고 낡았지만, 선생의 실력은 세월을 먹고 노련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4. 선생은 컴퓨터도 쓰지 않았고, 내가 애기 때 전굉필 소아과에서나 보았던 그 차트지에 볼펜으로 글을 썼다. 이분은 안경도 한 40년은 된 안경을 썼는데, 사람이 그렇게 클래식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낡은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하얀 가운을 입고. 


5. 나는 그동안 먹은 약봉투를 선생께 보여줬고, 선생은 “아주 잘 했어요.”라고 칭찬을 하며, “요즘 좋은 약이 많이 나왔으니깐, 꼭 나앗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해줬다. 선생은 나의 여래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무릎에 손을 얹고 병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해줬다. 상악동, 사골동, 전두동, 접형동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잘 치료해보자. 멀리서 왔는데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해줬다. 


6. 매주 2번씩 가서 치료를 받았으며, 약도 잘 먹었다. 약을 사흘 먹고 주말에 누워서 울고 있는데, 간장 다리는 냄새 같은 것이 나는 것 같았다. 두 달만에 맡는 첫 냄새였다. 반찬으로 멸치를 볶는 냄새였는데, 후각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감격했다. 


7.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를 가려니, 후각이 다시 사망했다. 샴푸하고, 바디워시하고 냄새 하나도 안 났다. 에프터쉐이브 안 났다. 이틀 정도 지나자 또 후각이 돌아왔다. 그렇게 후각은 산발적으로 돌아왔는데, 언제 어떻게 돌아오는지는 모르고 하루에 2시간정도 찾아왔다가 돌아갔다. 


8. 화장실에서 돌아올 수도 있었고, 점심시간 중국집에서 돌아오기도 했고, 지 마음이었다. 약올랐다. 나는 집이 멀어서 회사를 꽤 일찍가는 편이다. 하루는 후각이 이렇게 약만 올리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다. 차장님이 런던출장을 갔다가 선물한 핸드크림을 손에 문지르며, 코를 아무리 가까이 해도 다시 냄새가 나지 않자, 나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그렇게 울었다. 


9. 병원은 1주일에 2번씩가며 치료를 받았다. 반사경을 머리에 두른 할아버지 의사는 내 코를 이리저리 살피며 “지난 주보다는 좋아졌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며 늘 격려해줬다. 1.5주가 지나자 “흠.. 약을 바꿔보죠.”라며 약을 바꿨다. 아무튼 후각과 별개로 두통이나, 안면통은 사라졌고, 짙은 초록색의 농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선생을 만날 때 마다 조금씩 병세는 호전되었다. “어디 볼까요?”하며 선생은 한결 같이 반사경을 이마에 두르고 찌푸리며 코 청소를 했고, 40년된 안경테, 낡은 감색 뉴발란스 운동화. 늘 그대로였다. 


10. 한달 정도 지나자 코는 하얀색이 되었고, 코는 하루에 몇번 막히기는 했지만 후각은 돌아왔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서, 맡은 그 고약한 냄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11. 병원을 2달 정도 다니자, 선생은 이제 병원에 더 안 나와도 되고 피지오머로 코세척을 잘하라고 했다. 나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를 몰랐다. 


“선생님,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고쳐주셔서 감사하고 남은 인생 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고, 착하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선생은 포근하게 웃으며, “착하게 살아 온 것 같은데 왜 그러나? 나도 꽤 긴 세월았는데 이제 사람보면 대충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지. 아무튼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해. 마음밭 곱게 쓰고, 착하게 살아야 끝이 좋더라고요.” 


12. 뜻밖의 선생의 격려에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선생은 나의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며, “나도 잘 견뎌줘서 고마워요. 의사도 환자가 나아야지 즐겁죠. 가서 이제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고, 코 한 번 망가지면 쉽게 다시 망가져.”라고 얘기해줬다. 


13. 거의 두 달을 1주일에 2번씩 보면서, 선생과 나름 친해졌다. 선생의 나이는 놀랍게도 80이며,(진짜 개동안이심) 73년도에 박사학위를 받고 용산에 개원해서 거의 50년째 매일 같은 일을 하고 계셨다. 선생은 6.25도 경험했으며, 4.19도 학생 때 지켜봤고, 용산에서 동네 사람들 코,목,귀를 치료하며, 5.18 12.12 6.29등을 다 지켜봤다. 


14. 아쉽게도 올해 말이 되면, 병원이 있던 자리도 재개발이 되어, 병원은 헐린다고 한다. “그럼 은퇴하시나요?”라고 하니깐, 병원건물은 헐리지만 옆에 짓고 있는 초고층 오피스텔 2층에서 같은 이름으로 병원을 계속한다고 한다. 나이 80에, 건물 보상 받고, 쉬실 법도 한데. 나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15. 여든의 노의사는 50년을 하루 같이,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100명의 환자를 보고 있다. 

"선생님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끝. 

덧1. 아플 때는 병 키우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갑시다. 

덧2. 뜨거운 눈물을 흘린 날. 나는 중3때 이 경험을 했으면, 장래희망에 ‘주미대사’라고 쓰지 않고, ‘이비인후과의사’라고 썼을 거 같다. 물론 ‘이비인후과 의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과 가서 의대 진학 실패한 후, 공대가서 에쓰오일 엔지니어 됐을 거 같다. 내가 지금 ‘주미대사’가 아니라 에쓰오일 사무직 직원이 된 것 처럼. 결론은 에쓰오일? 

덧3. 옆에 있는 의사는 아들 같기도 했다. 나이는 딱 아들 뻘인데.. 

덧4. 동부이촌동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원래 유명한 병원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동부이촌동에 살던 연예인도 많이 다녔고, 나이 많은 연예인들은 아직도 많이 다닌다고 한다.

덧5. 이비인후과 다니면서 알게 된 건데, 코에 내시경을 넣으면 그 수가가 5천원이다. 그래서 병원가면 괜히 그거 한번 코에 넣어본다. 하지만 이 분은 내가 간 첫날만 내시경으로 봤고, 그 이후로는 3600원 기본요금만 받았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수가가 자유로우면, 36000원 내라고 해도 난 기꺼이 냈을 거 같다. 

덧6. 성모이비인후과라서 선생님이 카대의대 나온줄 알았는데, 연세의대 출신이면.. 종교가 가톨릭인듯 

진짜 끝.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우리는 국가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2024.12.13. Russell Napier 인터뷰 발췌 . 지금 봐도 놀랍네.. 번역은 번역기 시킴 ㅋ  Key takeaways  -------------------------------------- 역사적으로 30~40 년마다 통화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