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외교> 18장 봉쇄주의의 성공과 고통에서 발췌한 문장

헨리키신저가 쓰고 김성훈 참사관이 번역한 <외교> 18장 봉쇄주의의 성공과 고통에서 발췌한 문장들. 두 분과 미국에 심심한 감사와 경의를 보내며.

 

1.      1945년말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2.      하지만 미국 정치인들이 뭐라 부르든 간에 세력권이 실제로 등장하고 있었고 40년 후 공산주의가 붕괴할 때까지 존속했다.

 

3.      캐넌은 소련 외교정책이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의 이념적 열정과 오래된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팽창주의가 혼합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4.      해결책을 시도하는 게 미국인들의 국민성이었다.

 

5.      오로지 미국처럼 이상주의적이고 선구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국가만이 순전히 자신의 자원에만 기초한 전 세계적 경제회복이라는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6.      조지 케넌과 같은 뛰어난 관찰자가 미국 사회에 그토록 전 세계적이고, 그토록 엄격하며, 동시에 그토록 반응적인 역할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의 낙관주의와 불굴의 자신감이 궁극적으로 표출된 사례라 볼 수 있다.

 

7.      그리하여 소련을 구원하는 게 궁극적인 정책목표가 되었다.

 

8.      뉴딜 정책으로부터 정치적 안정에 대한 위협은 주로 경제적 사회적 기대와 현실 간의 차이에서 대두된다는 믿음이 나왔다. 그리하여 마셜플랜이 나왔다. 그리고 2차 대전으로부터 미국은 침략에 맞서는 최선의 방어책은 압도적인 힘과 이를 기꺼이 사용하겠다는 의지라는 교훈을 배웠다. 그리하여 대서양 동맹이 나왔다. 마셜플랜은 유럽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럽의 안보를 챙기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발족되었다. NATO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평시 군사동맹이었다.

 

9.      유럽 내 힘의 공백을 채우려고 미국이 단호하게 뛰어드는 모습에 봉쇄정책을 가장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조차도 놀랐다.

 

10.    대서양 동맹의 미국 지도부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도덕적 측면뿐 아니라 때로는 심지어 메시아적 측면에서 정당화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 지도자들은 유럽 외교를 특징지었던 국가안보와 균형상태에 관한 계산대신, 근본적인 가치와 포괄적인 해결책에 호소하기 위해서 평시 연합에서는 전례가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희생을 치렀다.

 

11.    훗날 비판자들은 이런 도덕적 수사의 소위 냉소적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봉쇄정책을 고안했던 사람들을 아는 누구도 이들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 정책에 미국의 가장 심오한 가치와 이상이 반영되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40년동안 그토록 혹독한 노력을 지속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기밀자료로 분류되었고 일반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없었던 정부 문서도 도덕적 가치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시각이 충분히 많이 드러났다.

 

12.    미국이 모든 인류를 위한 자유의 등불이라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내세웠던 독트리이 미국의 냉전철학에 스며들었다.

 

13.    NSC-68보고서는 겉으로는 매우 냉정한 현실주의처럼 보였지만, 민주주의에 관한 장황한 설명으로 시작해서 역사가 궁극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주장으로 결론 맺었다. 이 보고서는 보편성을 내세우면서도 동시에 무력을 포기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14.    자신의 자원을 쏟아 부어야 하는 벅찬 목표를 내세우면서도 막상 자신의 가치를 퍼뜨리겠다는 목표 외에는 어떠한 상호주의적 기대도 하지 않았던 강대국은 예전에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

 

15.    운명적으로 전쟁 직후 시기에 미국에는 확실히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뛰어났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16.    봉쇄정책의 결과 중 하나는 미국이 자국 국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 자신의 외교를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외교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봉쇄정책은 잇달아 지지자들로부터 점점 더 도전을 받게 되었고, 그중 에서도 존 포스터 덜레스가 가장 큰 목소리로 이런 주장을 대변했다.

 

17.    이런 논쟁은 리프먼이 예견했던 대로, 국제 위기가 도덕적 쟁점이 혼란스럽고 미국에 직접 위협이 되는지 입증하기 어려운 세계의 주변부 지역으로 점점 더 옮겨가면서 가속화되었다. 미국은 동맹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지역에서 애매모호한 명분을 위해 전쟁에 끌려 들어갔고 제대로 마무리 짓지도 못했다. 한국에서부터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이런 대규모 활동으로 인해 급진적 비판이 살아남았고 봉쇄정책의 도덕적 타당성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18.    만약 어떤 국가 자신의 외교정책에 대한 시험으로서 스스로에게 도덕적 완벽성을 요구한다면 그 국가는 완벽성도 안보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19.    1957년이되자 자유진영의 모든 전선이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 케넌이 이룩한 성취의 척도였으며, 그의 시각이 이런 노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실제로 너무나 효과적으로 방어태세가 구축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심각한 자기비판 분위기에 빠져도 될 정도였다.

 

20.    봉쇄정책은 비범한 이론이었다. 냉철하면서도 이상주의적이었고, 소련의 동기에 관한 진단은 심오했지만 그에 대한 처방은 특이하게도 추상적이었다. 유토피아주의라는 측면에서 철저하게 미국적이었던 이 이론은 전체주의 체제인 적의 붕괴를 본질적으로 온화한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21.    봉쇄정책은 미국이 40년 이상 건설과 투쟁을 거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기까지 견뎌낼 수 있게 해준 독트린이었다. 봉쇄정책의 애매모호함으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미국이 지켜주겠다고 했던 나라들의 국민들이 아니라 이들은 대체로 성공적으로 보호받았다- 미국의 양심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2.    미국은 도덕적 완벽성이라는 전통을 추구하느라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한 세대 넘게 투쟁을 벌인 후, 자신이 수행한 활동과 논란들로 인해 상처 입은 채 등장하게 되지만 결국 자신이 하려고 했던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해냈다

 


 


 


2024년 3월 19일 화요일

사바에의 기적

후쿠이현 사바에시.

 

전 세계 안경의 20%, 일본제 안경의 97%가 이 인구 7만의 소도시에서 생산된다. 사바에는 원래 겨울에는 먹을 것조차 변변치 못했던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다. 청일전쟁(1894) 직 후 일본경제는 극심한 불황을 겪는데, 가뜩이나 어려운 사바에의 경제는 개막장이된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 했던가? 마스나가 고자에몽(당시 28, 교육자겸 부잣집 아들)은 고향의 빈궁함을 목도하고, “사바에도 농업만으로는 만성적인 빈곤을 벗어 날 수 없다. 우리 마을에도 모노츠쿠리(物作り, 제조업)를 해야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땅을 팔아 오사카의 안경장인을 모신다. 그리고 동네 젊은이들에게 안경 만들기를 가르친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1896~1897년의 일이다.

 

1905년 마스나가는 안경 공장을 짓고 본격적인 안경 제작을 시작한다. 20세기초까지만 해도 동경산 안경 1, 오사카산 2, 후쿠이산 3류이었지만, 품질제일주의를 바탕으로 공정 개선(a.k.a. 분업화, 원래 이때 안경은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었는데, 공정을 module화함. 도요타가 따로없네 ㅋㅋ), 안경 소재(셀룰로이드 제작, 가공법)에 대한 혁신으로 1930년 후쿠이현은 일본 내 최대 안경산지로 거듭난다. 1935년 덴노(a.k.a. 천왕,일왕)의 진상품을 만들며, 마침내 일본 안경 챔피언이 된다.

 

일본제 안경에도 위기는 있었다. 바로 80년대 값싼 중국산 안경의 공습이었다. 중국산의 제조원가는 일본산의 100분의 1에 불과했다. 일본 제조업 전체가 엔고의 파고를 견뎌내야 했는데, 제조 공정이 200개나 되는 노동집약적인 안경 산업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일본 안경 산업은 구조적인 위기에 봉착한다.

 

사바에의 안경회사들은협회를 만들고 이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중지를 모은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협력과 고급화였다. (... 당연한 얘긴데…. 이걸 성공했다는 것이 사바에의 위대함이겠지?)

 

그 결과가 바로 1981년 일본이 내놓은 세계최초의 티타늄 안경이었다. 이건 좀 엄청난 일이었다. 티타늄은 꿈의 소재였다. 티타늄의 장점을 설명하자면, 철보다 2배 강하고, 무게는 절반 이하로 가볍다. 녹도 슬지 않으며 은빛에다 광택까지 나고, 철과는 달리 자석에 붙지 않으며, 탄성도 우수하고, ·전기 전도도가 낮고 인체에도 무해하다. 다만 다른 금속과 달리 제련, 합금, 절삭 과정에 매우 까다로워 꿈의 소재로만 남아있었다. (굳이 설명을 더 하자면, 한국기술로 티타늄 제련을 처음 성공한 건 2009년의 일이다.)

 

일본 안경회사들은 티타늄 안경으로 3가지를 손에 넣었다.

(1)티타늄 안경은 가볍고, 튼튼하고, 탄성이 좋아 그 자체로 소비자에게 고급으로 인식되었고 (처음에 스텐레스 안경쓰다가 타타늄 쓰면 고급감이 상당하다.)

(2)다른 금속으로는 내구성 등의 문제로 불가능한 디자인이 가능해짐으로써, 안경 디자인의 범위가 넓어짐

(3)티타늄 안경을 만들며 익힌, 티타늄 제련,합금,가공 기술로 다른 분야에 응용이 가능했다. (의료,산업용기구)

 

사바에는 지금도 세계 최고 안경 산지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후쿠이현의 안경 산업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후쿠이현은 일본의 북유럽이라고 불리며,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일단 끝.

 

현재 사바에에서 생산하는 안경은 크게 3종류다.

 

1. 일본 전통 하우스 브랜드 (창립연도)

- 마스나가를 필두로 일본 안경산업의 태동과 발전을 함께한 브랜드들

e.g. Masunaga (1905), Kamemannen (1917), Mizushima(1941), Kaneko (1958), 후쿠이안경산업 (1966), Matsuda (1967), Hakusan (1975)

 

2. 유럽(미국) 브랜드 OEM/ODM

- 토탈명품브랜드는 Italy에 보통 OEM을 주는데, “우린 안경 메이커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면 일본에 OEM을 준다.Luxottica의 최고급 Line은 일본에서 만든다.

e.g. 올리버피플스/바톤페레리아/스텐시라마스/타르트옵티칼/크롬하츠 등

 

3. 신생 하우스 브랜드

- Masunaga의 직원(장인)들이 나와 차린 안경회사만 12개다. 그런 전통은 지금도 계속 되고있다. 실력있는 장인들과 감각적인 젊은 디자이너는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한다. 그리고 시장은 이들을 지지해 준다. 심지어 이들은 일본 전통 브랜드보다 비싸게 팔린다. 브랜드만 남은, 박제가 되버린 명품이 아니라, 지금도 일본 안경산업은 펄떡펄떡 살아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세포분열.

e.g. Yellow plus (2001), Sugimoto kei (2007), Yuichi Toyama (2009), Stead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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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스나가의 연 매출은 300억원 종업원수 170 명이다. 마스나가가 소재부터 디자인 파츠 생산까지 모두 해 내는 몇 안 되는 대형 안경사인데도 그렇다. 생각보다 영세하다. 가장 큰 회사가 이 정도다. 이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과 별개로 후쿠이 모델이 일반화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2. 티타늄 안경을 처음 만든 것은 일본이었지만, 이를 브랜드화 한 건 북유럽 회사들이었다. 이들은 아주 심플하고 얇고 가벼운안경을 제작한다. 보통 나사도 쓰지 않고 티타늄을 꼬고 걸어서 렌즈를 고정한다. 처음 썼을 때는 착용감이 일품이나, 얼굴 위에서 balance 잡기가 어렵고(얼굴위에서 잘 흘러내리고, 운동할때 쓰기 어려움) 외부의 충격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국가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2024.12.13. Russell Napier 인터뷰 발췌 . 지금 봐도 놀랍네.. 번역은 번역기 시킴 ㅋ  Key takeaways  -------------------------------------- 역사적으로 30~40 년마다 통화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