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0일 금요일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없어지기 전에 남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없어지기 전에 남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신이 이미 20여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도 변변한 기록도 없다. 아버지와 친척들의 구전,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내가 직접들은 이야기를 모아 할아버지의 인생을 정리했다. 구체적 연도나 세부적인 이야기는 틀릴 수 있지만 얼개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시작은 평범하게 가난한 집이었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금은 수원교도소 뒷동네가 된 수원 연무동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나에겐 증조할아버지)는 잔반의 후손으로 평생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 글만 읽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한량이었다. 증조할머니는 당시 꽤나 사는 집의 딸이었으나 집안이 좋다라는 잘못된 정보를 습득하여, 증조할아버지의 집에 시집을 왔다. 증조할머니는 평생 삯바느질, 남의 집 단기 알바 등으로 평생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증조할머니는 딸--아들-아들 순으로 자식을 4명 낳았고, 우리 할아버지가 셋째 아들이다. 다같이 가난하던 시절이지만, 할아버지는 그 와중에 드럽게 가난한 집이었다. 비만 오면 물이 새고, 겨울에 옆집에 사람이 얼어 죽어 나가는 걸 보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가난이 평범하던 시절이라 할아버지의 인생도 매우 평범하게 흘러갈 뻔했으나, 할아버지에겐 운명을 거스를 만큼 소학교때부터 공부에 재능을 보였다.  

 

물론 할아버지 집은 공부시킬 형편이 안 되었다. 할아버지는 소학교 내내 사과 상자를 책상으로 삼아 공부했다. 하루는 너무 추워 아궁이에 이 사과상자를 떼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기도 했다.

 

당시는 소학교가 의무교육의 끝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학교 졸업으로 학력을 마쳤다. 할아버지는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으므로, 중학교 진학을 원했다. 서울로 올라가 중학교 시험을 쳐서 무난히 합격했다. 문제는 중학교 등록금이 없었다는 점. 집안에서도 소학교를 마쳤으니 뭔가 돈을 벌어왔으면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중학교 입학금을 빌렸다. 물론 당시는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일일이 집을 찾아가 안녕하세요. ~~인데요.”라고 하면 반가워하며, “그래 들어오너라. 그런데 무슨 일이니?” “제가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요.”라고 하면서 등록금 동냥을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에 공부를 하고 싶어 돈을 빌리러 친척집들을 전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딱하다. 할아버지는 몇 군데의 거절과 갹출을 통해 등록 마감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등록금을 마련했다.그 돈을 들고 중학교로 달려갔으나, 너무 늦게 도착해 학교의 불은 꺼져있었다. 할아버지는 가로등도 없는 그 밤에 굳게 닫힌 중학교 문을 잡고 엉엉 울었고, 한참을 울고 있다보니 당직 선생이 나와 자초지종을 듣고 등록을 받아줬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하며 혼자 일해서 학비 벌고 공부했다고 했다. 어디서 거주했는지는 모른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주야독경의 생활을 했다.

 

서울의대 합격

그 와중에 나라는 해방되었고, 할아버지는 대학입시를 쳤다. 할아버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하였다. 그때는 서울대 교복이 있을 때라 이걸 그렇게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서울의대생 할아버지의 고생도 끝이 보였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급하게 고향 수원에서 전보가 왔다.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일하고 오는 귀가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할아버지가 가보니, 할머니는 수원역 인근 기찻길에서 무단횡단을 하다 기차에 치여 즉사하였다. 게다가 열차운행에 방해가 되었다며 철도청(?)으로부터 꽤 많은 손해배상액도 청구되었다. 할아버지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오열했고, 백방으로 호소해봤으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얘기만 돌아왔다.

 

스무살의 고학생 할아버지는 억울하고 분해 견딜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마음에 몇날 밤을 분하게 지새운 후 할아버지는 법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할아버지는 법대로 전과를 했다. 할아버지의 목표는 2가지였다. 1. 법관이 되어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증조할머니의 억울함을 푸는 것. 2. 법관이 되어 당신처럼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휴머니즘. 할아버지가 법대생이 된 그 해 북한이 쳐들어 왔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6.25썰은 너무 길어서 이후에 다시쓰기로 하겠다. 할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이 죽었고, 첫째누나는 피난길 한강을 건너다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 실종되었다.


<폭파되는 한강다리>



전쟁이 끝나고 할아버지는 서울로 돌아왔고, 고시생이 되었다. 역시 신문돌리기, 가정교사 등을 하며 할아버지는 고시를 봤다. 할아버지는 27살까지 고시공부에 매진했으나 끝끝내 패스하지 못했으며, 할아버지는 고시를 포기하고 할머니와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물리적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초등학교때부터 20년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사에 죽을 각오로 달려왔고 늘 굶주림과 싸웠던 할아버지는 번아웃 되었다.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때 그때 고시공부했던 법전과 법교과서를 수십권 발견했다. 그리고 전보로 받은 1차 합격증, 답안지 연습장, 요약 노트 등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법관이 못 된 것을 아쉬워했고, 그 책을 노년까지 보관할정도로 미련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선생으로 사회진출

전쟁이 끝난 195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극빈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공무원이 되지 못하면 마땅히 취업할 곳도 없었다. 결국 공무원이 못 되면 엘리트들이 다음에 취업할 수 있는 곳은 은행이나 학교가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고향 수원으로 내려가 1956년 고등학교 영어선생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며 돈을 모았고, 아버지가 유치원을 가던 해 모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다. 은행을 다니며 그간 모은 돈을 모아 수원 북문로터리 중심가의 건물을 샀다. 이때 건물은 단층이었지만 로터리와 터미널이 있던 핵심 상권이라 다방, 슈퍼 등이 입점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오빠 그러니깐 할아버지의 매형에게 이곳의 다방을 세줬다.

 

가락동 땅 매입

할아버지는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한 성격덕에 은행에서 승승장구했다. 신규지점인 천호지점장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천호지점장을 하던 1969년의 일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가락동 과수원 주인이 할아버지에게 과수원을 매입해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송파구는 뻘과 과수원 밭이었는데, 할아버지는 1970년 가락동 땅 5만평(165m2)을 은행 대출을 끼고 500만원에 매입했다.




이 땅이 지금의 경찰병원 근처라고 한다.


<5만평이면 165m2. 즉 헬리오시티로 옮기면 헬리오시티의 절반정도 되는 땅이다.>

 

1년 정도가 지났더니 어떤 업자가 나타나서 저 땅을 800만원 쳐줄 테니 자신에게 팔라고 해서 할아버지는 어차피 뻘과 망한 과수원땅 붙잡고 있어 뭐하나, 하고 판다. 1년만에 300만원을 번셈. 그걸로 녹번동의 신식 주택을 사서 이사간다.

 

당시의 최첨단 사업인 물티슈 공장 건설

할아버지는 이후 종로 지점장을 지냈는데, 지점에서 횡령사건이 발생해 지점장을 그만 두고 나오게된다. 가락동 팔고 남은 돈과 퇴직금을 모아 무엇을 해볼까? 고민하던 할아버지는 녹번동 집을 담보로 당시에 최첨단 사업인 물티슈 공장을 마포에 차린다. 1972년의 일이다.

 

녹번동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일본에서 기계를 사들여서 마포에 물티슈 공장을 지었다. 두루마리 휴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물티슈라는 재화를 못 본 사람이 국민의 대다수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종로지점장을 하며 거래처와 시내의 음식점을 다니다 일제물티슈를 보았고, 이를 국산화하여 여러 음식점에 납품하면 필시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점 주인에게 물티슈가 왜 들쭉 날 쭉 하냐고 하니 일본에서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공장을 짓고, 이제 생산을 좀 해보려는 1972년 여름.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태풍 베티를 동반한 사상 최악의 폭우가 서울을 덮친다.


<출처 동아일보, 서울 지역에 이틀동안 400mm의 폭우로 대부분의 지역이 침수됨>



<물에 잠긴 서울 시내, 출처 조선일보> 


할아버지의 인생을 건 도전. 물티슈 공장은 물티슈 한장 찍어보지 못하고 기계가 물에 홀딱 잠기고 수해에 유실되어 망했다. 할아버지는 녹번동 집에서도 쫓겨났으며 할아버지의 식구들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내 앉는 신세가 되었다.

 

할아버지네는 6가구가 한집에서 사는 전셋집으로 이사갔으며 6식구가 방2칸짜리 작은 집에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물론 화장실은 야외에 있었고, 그 화장실을 할아버지를 포함한 6가구가 썼다. 녹번동 신식 양옥집에 살았다 하루아침에 전셋집으로 나락.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날마다 싸웠다고 한다.

 

다시 구직활동

할아버지는 다시 구직활동에 나섰다. 할아버지의 서울대 법대 친구들도 나서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여기 저기 구직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때마침 일본의 T전자회사가 경남 마산에 공장을 지었고, 할아버지가 여기 현지인 공장장으로 낙점되어, 마산으로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마산에서 자취하고, 할머니와 아버지 고모, 작은아버지 등등은 서울 그 전셋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중학교 때 일이다. 할아버지가 T전자 공장장 1년만에 빠르게 가세를 키워, 다시 아버지는 그 전셋집을 탈출해 역촌동 서부병원 뒤의 양옥집으로 이사갈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대학교때  까지 T전자 공장장으로 일했고, 가세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을 할 때 모아 사뒀던, 수원 북문 로터리의 건물들이 오랜 송사를 겪었는데, 이때 즈음 할아버지가 최종 승소하며 수원건물을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니들은 앞으로 여기서 월세 받고 살거라. 우리집안은 이제 걱정없다.”라고 대학생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얘기했다고 한다.

 

반월공단에..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의 서울대 상대 후배가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이 후배는 한국 최고의 재벌기업의 가장 잘 나가는 계열사 종합상사를 다니고 있었다. 회사에서 텐트를 수출하는 일을 하는데, 선배님이 수원에 땅과 건물이 있다는 걸 들었다. 그거를 팔고 반월공단에 텐트 공장을 지어 납품하시라. 라고 동업제안을 했다.

 

할아버지는 또다시 번뇌했다.

 

1980년대초 종합상사는 붐을 타고, 외화를 벌어오는 역군이었고, 주변에 종합상사의 벤더가 되어 큰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차피 월급쟁이 공장장의 미래도 불확실하고, 일본에게 한국이 생산기지로써의 매력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21억원에 수원 로터리에 있는 건물을 팔아버리고 (현재는 고층 빌딩이 있는 자리임) 반월공단에 텐트공장을 인수하여, 텐트 납품 사업을 시작했다. 공순이 300명이 일하는 나름 큰 공장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처음에는 잘 됐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일본 전자회사의 자회사 공장장을 해본 것이지, 직접 물건을 만들어서 경쟁해서 한국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해본 공장장을 해본 것은 아니었다.

 

이 공장의 문제점은 인력수급이었다. 공순이를 서로 뺏고 뺏기는 일이 빈번했다. 게다가 대기업 종합상사의 갑질이 상상 이상이었고, 여러가지 일이 겹치며 할아버지는 결국 3년만에 모든 것을 날리고 나왔다.  

 

물론 1980년 수원의 건물을 팔고, 21억원을 다 공장을 짓는데 사용한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남은 돈으로 새로운 집을 샀다. 그때 고민했던 것이 1. 논현동 단독주택(MB 살던데 근처) 2. 방배동 대형 평수의 최신형 아파트였다. 할머니는 방배동 아파트를 보고 와 그 당시의 최신식 아파트의 구조에 감명받았다. 물론 이때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디로 갈까 몇 달을 고민했다고 한다. 아파트에 살아 본 일이 없고, 주위에서 아파트 생활의 쾌적함을 노래하던 때라 할아버지는 방배동 60평 아파트로 최종 결정했다. (사실은 할머니가 결정)


<논현동 1985, 출처: https://m.blog.naver.com/telience92/221574700365>




할머니가 사려고 했던 집은 현재 논현역 사거리 우리은행 건물이 되었다. 

 

반월공단에서 사실상 전재산을 날린 할아버지는 다시 빈털털이로 나왔으나, 이번엔 사정이 좀 났다. 방배동에 아파트도 있었고, 애들은 다 대학에 갔고, 반월공단 사장할 때 타던 각그랜저도 있었다. 암튼 다시 먹고 살아야하니 할아버지는 새로운 일을 알아봐야 했다.

 

마지막 도전

1980년대 중반. 아버지는 결혼해서 출가했고, 할아버지의 나이도 이제 50대를 지나 환갑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는 남자 기대 수명이 60이 될랑 말랑 하던 시절이라 할아버지도 인생의 마지막 도전을 남기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전자회사를 하던 사람들 만나러 일본 출장을 가고, 또 나름 한국 종합상사 인맥을 활용해서 사업 아이템을 물색했다. 할아버지의 결론은 한국의 고급 농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


할아버지는 작은 무역회사를 차리고, 한국의 새조개, 송이버섯을 일본에 수출했다. 나중에는 중국산 영지버섯을 공수해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이것도 꽤 잘되며 할아버지 역시 부활했다. 88서울 올림픽을 할 즈음인데, 할아버지의 회사는 승승장구하여 삼성동 무역센터 38?에 자리잡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 회사에 가끔 놀러갔는데, 할아버지가 코코아를 타줬다. 아니, 정확히는 여직원을 시켜 코코아를 타오라고 했다. 당시 할아버지 사무실에서 서울시내가 다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높은데 살아야 하는구나를 어렸을 때 깨쳤다.



문민정부가 들어오고, 얼마 안가 원화 절상 등의 이유로 일본에 농수산물을 수출하는 일이 어려워졌고, 할아버지는 50대 후반의 나이로 모든 일을 접었다. 물론 60대 때도 뭔가를 항상 하셨다. 할아버지는 고시를 보면서 몸이 너무 망가져 이후 철저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엄청나게 건강하셨다. 모두들 할아버지가 100살까지 사실거라고 했지만, 70대 초반 갑작스러운 사고로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친구들은 잘나갔다.

할아버지의 서울법대 동기들은 5공 육법당의 핵심 of the 핵심이었다. 대법관, 검총 등은 물론 장관도 여럿 있었다. 고시 패스한 사람 중에 기관장 못해본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고시를 패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다. 할아버지의 법대 동기 중에 가장 잘 나갔던 사람은 5공의 후계자로도 물망에 올랐던, 5공 테크노크랏의 화신 노신영 총리다.


<노신영 전 총리 출처: 연합뉴스>

 

이 할아버지들은 60줄이 넘어 은퇴한 후 매달 만나고, 1년에 1-2번 부부동반 모임을 했는데 할머니가 여기만 갔다오면 당신은 고시도 패스 못하고 뭐했냐?”고 온갖 성질을 부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인생은 아쉬움 투성이다.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는 무탈하게 서울의대 나온 의사로 큰 고생하고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돈도 더 많이 벌고, 그 시절 서울의대 나온 의사니 최소한 어디 병원장은 했겠지. 이길여 박사만큼은 못됐을 지라도 암튼 아쉽다.

 

그 시절 사법고시에 붙었더라면?

 

그게 아니라면 가락동 땅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면 또 어땠을까? 헬리오시티의 반이 우리집 껀데가락동이 개발될 때 조금씩 잘라가며 팔았어도, 지금 우리집은 수천억대 부잣집이었겠지.

 

1972년 서울에 대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님 할아버지가 1년만 빗겨서 1973년에 물티슈 사업을 구상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말짱히 전란이후에 샀던 수원 북문의 빌딩은 뭐하러 팔았나? 이거 지금 수백억인데.

 

그래.. 그것도 아니라면 방배동 아파트가 아닌 논현동 사거리 주택을 샀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수원 북문 빌딩보다 논현동 빌딩이 지금 더 비쌀 거 같은데.

 

다 지나간 일이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아니겠는가? 다만, 할아버지가 인생을 스쳐간 노다지의 하나만 잡았더라도 우리 아버지는 우리 엄마랑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세상에 없었겠지 ㅋㅋㅋㅋ 다 못나가서 평범한 우리 엄마랑 결혼.

 

까놓고 말해, 우리 할아버지가 동시대의 또래보다 못 살았나? 그건 아니다. 너무나 대박인 기회들을 허망하게 날려서 그렇지. 할아버지는 서울대 법대 나와서 꽤 부유하게 애들 키우며 잘 사셨다. 1920년대 생 중 상위 10% 정도는 되는 삶 아니었을까? 이렇게 삽질을 했는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은 꺾이지 않은 마음.”이다. 할아버지라고 회환과 후회가 없었겠는가? 손절 타이밍한번 못 잡아서 두고 두고 후회하는 나의 성격을 볼 때 나의 인생에 위에 나열한 하나만 있었어도 나는 그 아쉬움의 노예가 되어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늘 도전했고, 지난 일은 잊고 다시 다음을 준비했다. 노인과 바다를 읽을 때면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 / 김종인

  

 Intro

영원한 권력은 없다.’가 개인의 자서전이라면, 본서는 김종인의 인생에서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며 느낀점을 회고함. 김종인은 초대 대법원장 가인의 손자로 정부 수립 이래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윤석열까지 모든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봐온 매우 특이한 사람. 시장에서 일단 짬타이거가 되면 인싸이트가 있음. 우리 중에 인플레이션 시기였던 1970년대 시장에 있던 사람이 없어서 우왕좌왕 하는 것처럼, 당시를 가까이서 생생하게 겪어낸 현역이 있으면 상당히 파워풀 할 것. 김종인이 그러함. 김종인은 대통령을 회고하며, 대통령은 필연적으로 실패하며, 내각제 지지를 시사하며 책을 마침

 

Key Findings

한국 정치인은 공화주의적 사고가 결여. 공화주의 회복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중요한 과제. 보편국민이 이끄는 나라. 갈등이 아니라 협의와 합치가 가장 중요.

나도 평소에 이렇게 생각함. 국민들과 정치인 모두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감과 컨센서스는 있는데, 공화주의가 뭔지를 모르고 사뿐히 무시함. 공화주의 질서를 회복할 때 현재 한국 정치가 처한 다양한 난관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뵘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집권세력에 대한 지지율로 착각하면 안 됨. 대통령 지지율은 과대평가 됨. 총선과 지방선거등 민심이 정확

 

세금 함부로 쓰는 정권은 바로 심판 받음.

관료의 전문성 + 정치인의 창의성= 시너지,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정치인

윤석열의 집권을 예감한 듯 정치는 법정이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 정치인이 관료에 밀리면 안되고 관료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창의적 해법을 특히 정치적 해법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함

 

김종인은 87년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이 단일화했어도 노태우가 이겼을 것이라고 판단. 정치에서 1+1=2가 아님. 당시 한국경제는 연 8%의 고도성장을 하고 있었고, 국민들이 모두 하루가 다르게 생활 여건이 개선되고 있었음을 느낌. 이럼 국민들이 이룩한 성과를 잃고 싶지 않다는 보수적인 욕망 작동함.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민주화 열망도 있었지만,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그동안 이룩한 성과가 무너지거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여론이 당시 분위기

동교동계 상도동계 모두 야당만해서 국정을 운영할만한 테제를 가지고 있지 못함. 이건 문재인 정부 때 드라마틱하게 증명됨. 따라서 노태우를 선택한 당시의 국민이 꽤 현명하다고 볼 여지도 있음

 

김종인이 생각하는 경제민주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경제민주화가 아님. 개입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분명한 태도가 경제민주화. 가급적 모든 것을 자유시장의 원칙에 맡겨두고 특정한 경제주체가 그러한 원칙을 위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질서를 유지해, 시장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 정부는 시장이 실패한 경우에만 개입해야 함. 특정 경제주체가 지나치게 비대해 시장을 교란할 때, 그냥 시장에 맡겨 놓으면 시장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시장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것.

이 정도가 경제민주화면, 100% 동의함

 

통일은 정책으로 되는 것이 아님. 북한이 변화하기 기다리면서, 선을 못넘게 하는 것. 큰 문제 없는 한 현상 유지로. ‘게임 체인저되겠다고 다내는 것이 가장 위험. 2020년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때 문재인이 뭔가 했어야 했지만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처럼 대함.

김종인은 지독한 현실주의자라 반통일주의자가 되는 것은 필연. 근데 나는 공감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수 없음. 친미가 미래. 현실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미국이 중국을 대체한다는 생각자체가 역사와 현실의 배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

 

비스마르크 신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지나갈 적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투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

 

역대 대통령 평가

이승만

<재팬 인사이드 아웃>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될 정도로 국제 정세 흐름 읽는 눈 밝음. 2차 대전 이후 국제 정세가 급속히 냉전으로 전환하고 한반도에서 열강의 이해관계가 맞부딪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의 냉철한 판단과 고집이 아니었으면 한국은 없었을 것. 복잡한 대내외 환경 가운데 정확한 현실 판단으로 정부 수립을 이끌었고, 외교적 경험과 역량으로 유엔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미국과의 군사적 동맹관계 확립. 대단한 업적임.

정치적으로는 꾀가 많고 교활한 사람. 후계자 꿈꾸는 이범석, 장택상, 이기붕 충성 경쟁 유도하며 집권 이어감. 사사오입, 315 부정선거로 골로 감. 말년의 실책이 많은 것을 무색케 만듬.

 

윤보선, 장면

걍 ㅄ

 

박정희

516 쿠데타 이후 나름대로 합법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특이. 1952년 이집트 군사 쿠데타 일으킨 나세르와 자유장교단 벤치마크 한 것으로 뵘

박정희 수출주도 정책으로 경제 발전한 것은 업적. 굉장한 도박. 군인들 특유의 하면 된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콤플렉스. 방탄내각, 대선 등. 심지어 경제적 성과를 남김으로써 역사의 오점 지우고 싶어했다는 아이러니.

경제개발해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음. 1960년 외환보유고 23백만불. 1964년 박정희가 서독에서 4천만달러 차관으로 경제발전 종잣돈.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하면서 받은 8억 달러 자원 역시 소중. 1967년 대선 낙승 잘 살아 보자.”시대 정신 영리하게 catch.

 

박정이도 집권 3기부터는 이승만 태크. 정상적인 방법으로 연임은 어렵다고 판단 1972년부터 오로지 긴급 조치에 의거해 국가 통치. 1971년 총선에서 서울에서 1석 빼고 전패. 유신이후로 개판침. ‘일단 집권에 성공한 세력은 권력의 힘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라는 발상의 원조. 한국 정치 역사에 가장 큰 해악

 

박정희는 국가 사회주의식으로 경제 이끌어 감. 경제가 발전하며 시장 매커니즘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짐. 경제구조가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국가사회주의로 경제 이끌어가는 거 무리.

독재자의 딜레마, 경제가 성장하면 민주의식도 함께 성장

박정희 정치 센스 괜찮음. 근로자 재형저축, 사회의료보험 제도. 관료들이 반대했으나 대통령이 품. 정치인이 해결할 영역이 분명이 있음.

 

최규하

9개월로 너무 짧긴했는데 그와중에 온갖 ㅄ 짓

 

전두환

전두환이 물가 안정시킨 방법은 예산동결. 인위적 재정 동결해 추가 지출을 막음. 근로자 임금동결, 추곡수매가 동결, 아파트 분양가 동결. 이렇게 물가 잡는 것이 무슨 의미임? 실업률을 낮추겠다고 허드렛일만 세금 쏟아부어 만든 문재인과 다를 바 없음.

 

전두환도 정치 센스 있음. 논리로 설득하면 설득됨. 김종인이 1982년 교육세, 1987년 헌법에 경제 민주화 조항 넣을 때 설득하고, 이해하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마치 전두환 본인의 생각인양 잘 설명하고 관철.

 

전두환을 무너뜨린 3가지. 1. 출발부터 광주 민주화 운동 잔인하게 학살 2. 장영자-이철희 사건 (국민들은 이를 대통령 친인척 비리로 인지함. 전두환은 먼친적에 불과하다고 사실위주로 판단하여 대충 뭉갬) 3. 198512대 총선결과로 정치적 붕괴

 

전두환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단임으로 끝냈다는 건 평가할 만함. 앞선 독재자였던 이승만, 박정희도 하지 못한 결단.

 

3저호황은 전두환의 성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발생했고, 심지어 전두환이 이를 잘 활용했다고도 볼 수 없음.

 

전두환 최대 업적은 삼성전자 만든 일. 반도체사업. 국가와 기업이 한몸으로 움직임. 반도체 사업에 대한 반대 엄청 많음. 소재산업에 투자에 매우 회의적 분위기. 전두환 정부 파격적으로 반도체 지원.

 

반도체 장비 수입할 때 관세 면제, 수도권에 공장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토지매입에 협조. 대학에 전자 관련 학과를 늘려 인재를 양성, 다른 기업으로 가려는 인재를 국가가 나서서 삼성반도체 취업 유도. 1980년대 IT 산업이 미래라는 건 전세계 모든 정부가 알고 있었음. 하지만 국가가 이렇게 밀어준 건 한국이 유일.

 

노태우

한국 국민들은 반 계단 반 계단 매우 조심스럽게 민주화로 나아감. 즉 전환기(징검다리)1차 노태우 2차 김영삼을 택하며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권력이양하는 방법을 택함.

 

1987년 직선제가 성취되자, 국민이 원하는 대로 헌법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발견하자, 민초들 폭발함. 20여년동안 억제된 분배의 욕구 폭발. 노조 등등 노사분규 극심.

 

노태우 정부는 경제성장과 근로자의 소득 성장이 엇비슷하게 나타나는 유일한 시대. 마이카 시대 도래. 아파트 거주자 크게 늘어 국민의 생활수준이 질적으로 도약. 노태우의 공약은 임기말 국민소득 5,000달러 달성이었는데 임기말 7,700달러 초과 달성.

 

노태우는 물태우변화를 순리로 받아들이며 성장의 동력 이어나가 두마리 토끼 한번 에 잡음.

 

북방정첵은 보수정권이어서 가능했던 일. 보수는 진보적 개혁을 해나가야 되고, 진보는 보수적 개혁을 해 나가야 함.

 

김종인 본인 자랑. 1986~1989년 국제수지 흑자 330억불 중 130억불이 재벌의 토지 매입에 소요. 김종인 경제수석이 5.8 조치를 통해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 매각시킴. 덕분에 IMF 경제 위기 맞았을 때도 극심한 붕괴를 면할 수 있었음. 일본은 버블경제의 정점에 재벌이 부동산에 무분별하게 투기해서 골로감.

 

노태우 SOC 투자도 평가. KTX, 인천공항, 서울외곽순환도로, 발전소 지어 발전용량 크게 확보. 완료한 사람이 아니라 첫 삽을 뜬 대통령을 평가해야 함.

 

노태우의 과오는 3당합당. 여소야대를 처음 경험하자, 쫄보 노태우가 어쩔줄 몰라하고 정치공학적 해결책을 내놓으며 호남 포위. 지금까지도 지역갈등심화의 뿌리

 

노태우의 가장 큰 과오는 재벌과 혼맥. SK에 이동통신 무리하게 주다가 YS한테 약점 잡혀서 내내 YS의 무리한 요구 다 들어주고,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데 열심. 부패는 부패를 낳는 법.

 

김영삼

김영삼은 콤플렉스 덩어리. 김대중과 박정희 모두에게 콤플렉스 있음. 김영삼은 박정희의 경제성과가 관료들이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음. 김영삼이 취임하면서 GDP 1만달러 달성. 관료들이 달성하기 위해 시장을 왜곡하는 무리수 던지다가 사달남. 유일하게 취임할 때보다 퇴임할 때 경제 쪼그라든 대통령.

 

하나회 척결은 좀 오바. 1990년대 초반 하나회는 사교모임으로 쪼그라들어 있었고, 민주화 이후로는 진급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서 신입회원들 받기 어려운 상황. 김영삼이 쌩쑈함. 가상의 적을 설정해 놓고 무척 어려운 일 수행했다고 자랑함. 금융실명제도 딱히 ㅋㅋ

 

김영삼이 이거로 지지율 재미봐서, 이 이후의 대통령들이 국민의 삶에 실익이 없는 겉치레 이벤트를 성과로 자랑

 

김대중

김대중은 임기중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 신중하고 부지런. 다소 몽상적인 측면도 있지만, 막상 문제가 닥치면 그것을 푸는 방식은 대체로 현실적

IMF 외환위기는 미국의 도움과 중국의 부상으로 극복

미국 재무부 차관이 김대중 당선자 신분일 때 직접 방문하여, 국가관 경제관 등 사상 검증함. 채무 이행의지 IMF 권고에 따른 개혁의지 있는 의지확인. 국가로서는 굴욕적이지만, 위기의 지도자는 그 정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하고, 김대중은 했음.

김종인은 김대중의 IMF 극복과정이 잘못됐다고 지적. 재벌을 더 큰 부자로 만들어줌.

김대중의 용인술은 평가.

김대중은 주변에 야당, 재야 운동권 생활만 하던 사람들만 있어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음. 따라서 경제관료 등은 DJP 연합에서 JP 사람들이 함. 재무장관, 금융위원장, 건설부 장관 등 경제부처는 모두 JP 라인이 장악. 문제는 박정희때 경제관료들이라 해결방식이 박정희식

김대중은 주변에 고생한 애들 한자리씩 줘야 되는데, 국가운영에 쓸 수준이 안 되니깐, 지방자치해서 한자리씩 준건가? 그래도 중앙정부에 안써서 나름 integrity는 있다고 봐야 하나? 


초대 비서실장 민정당3선 노태우 정무수석했던 김중권 시킴. 자신과 인연을 따지지 않고 필요한 사람 쓰는 것이 김대중의 큰 장점.

정치보복하지 않았던 것도 김대중의 업적. 아마 김영삼이 이회창을 낙선시키려고 이인제 뽐뿌 넣었던 건, 이회창이 되면 보복할 거고 김대중은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라고 판단했을 것

과거 가장 많이 탄압 받았으나, 전직 대통령과 유가족 가장 예우해 줌.

일본문화 개방과 한일관계 평가.

북한문제는 개폭망. 본인이 자신있는 문제라고 판단해서 이부분에 있어서는 누구의 의견도 안듣고 이 사달을 냄.

홍삼이 관리 못하고 자멸 


노무현

노무현은 아마추어

삼성 보고서로 국가 이끈 정부. 세상에 세금으로 부동산 잡는 나라가 어딨음? 세금으로 부동산 잡겠다는 발상 자체가 세금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는 것. 노무현정부의 핵심이었고, 현재 우리나라 정치권의 주류인 이른바 86세대들이 세금에 대한 기본인식이 잘못되었음. 재정의 근간이 세금을 어떻게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지. 국가 운영의 기본 준비가 안된 것.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는 것은 위험

 

노무현은 임기 내내 마치 싸움을 못해 안달난 대통령 처럼 처신. 한미FTA나 이라크 파병은 이왕 했으면 잘 마무리해야지 갈팡 질팡하고, 뭐 뒤돌아서 딴말하고 그럼.

 

한국인들 죽은 자에게 관대한데, 공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이어야 함. 본인이 아무리 억울하고 차기 정권의 모욕주기식 보복이 섞여있었다 한들, 국법에 따른 응당한 절차를 밟았어야 옳음. 그것이 제도와 질서를 수호하는 대통령의 자세.

 

노무현 본인의 바람과 달리, 화합의 상징이 아니라 복수의 상징이 됨

 

이명박

기업인 출신은 대통령하면 안 됨.

경제의 주인공은 기업인이지만, 기업인은 기업을 해야 함. 기업은 어떻게든 이익을 내야하기 때문. 국가는 그렇게 운영하면 안 됨. 747한다고 강만수 데려와서 대놓고 고환율 조작. 기업은 손익을 냉혹하게 따져야 하고, 투자한 일에는 반드시 이익을 회수해야 함. 하지만 정치는 때로는 회수할 수 없는 일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결단해야 함

 

이명박 정치적 감각 전혀 없음.

한미 쇠고기 협상 정무적 판단 못함.

 

박근혜

후보시절에는 괜찮았음. 이명박한테 경선지고 이명박 당선을 위해서 쓰고, 대통령되고 싶다고 김종인 찾아와서 잘 듣고 배우고, 근데 선거 진행될수록 인의장막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독대나 면담도 못함. 바로 팽당함 ㅋㅋㅋㅋㅋ

박근혜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김종인은 박근혜에 대한 말을 아끼는 듯 ㅋㅋㅋㅋㅋ

 

문재인

형식적 적법성의 힘을 빌려 박근혜보다 큰 전횡.

수법이 교묘해지고 염치가 없음. 참혹한 권력의 사유화

배우를 뽑듯 전문 지식과 경험 없는 인물을 오로지 운동권 출신과 대통령과 가깝다고 임명

참모들이 이상한 경제학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을 밀어붙이다가 고용지표 파탄내고 주중대사로 영전.

과거에는 그래도 해당분야에 전문분야가 있거나 기본적 소양정도는 되는 사람을 지명했고 여론이 부정적이면 철회하거나 본인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 문재인 정부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정권은 없음. 박근혜 때도 숱한 사람들이 낙마했음.

사법부까지 사유화. 역사상 대법원장은 무난한 인물을 임명. 문재인은 대법원장에 대법관을 거치지 않고 코드 맞는다고 파격임명.

김명수 근무지 춘천에서 시외버스 타고 서울로 와서 대법원 청사 도착. 그러나 임명된 후 김명수는 수억원의 예산을 들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강남 안파트 분양에 당첨된 아들 내외를 관사에 불러 살도록하고, 며느리 대기업 변호사로 활동하며, 대법원장 공관에 직원들을 불러 파티.

문재인 SF 영화보고 공포감에 탈원전. 멀쩡하게 가동하는 원전 설비(월성 1호기) 폐쇄. 평가결과 조작. 들통나자 헌법기관 감사 방해. 공직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렴치

문재인은 모든 잘못을 지난 정부의 폐해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자기 정부의 임기 중 발생한 모든 성과는 자신들의 공로인 것처럼 독점

 

사과에 대해 극단적으로 인색하고, 책임감없는 대통령. 코로나19 K 방역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자영업자들의 희생으로 얻은 결과. 하지만 사과 안하고 방역 잘하니깐 질문없냐?” 며 고통받는 국민 앞에서 괴이한 농담

 

검찰개혁은 건국이후 가장 이중적인 모습. 권력에 필요할 때는 한껏 추켜세우다가 비리문제게 원칙대로 수사하니 악덕하고 부도덕한 사람의 표본으로 만듬. 사법행정을 권한의 개념으로 봐야 하는가?

 

문재인은 대립을 수습하기는커녕 사태를 관망하고, 대립을 즐김. 양념드립.

 

인위적으로 소득을 올려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단세포적인 사고는 고용참사.

 

우리는 국가자본주의로 가고 있다.

2024.12.13. Russell Napier 인터뷰 발췌 . 지금 봐도 놀랍네.. 번역은 번역기 시킴 ㅋ  Key takeaways  -------------------------------------- 역사적으로 30~40 년마다 통화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