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1649년 청교도
혁명 때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다. 악의 수괴를 처형하면
정의로운 세상이 절로 올 것이라는 민중의 기대와 달리 영국은 지독한 혼란과 내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그
결과 크롬웰이라는 더 지독한 독재자가 출현하였다.
1688년 영국 국민들은
명예혁명에서 제임스 2세를 축출할 때, 이번에는 그를 처단하지
않고 그가 프랑스로 망명할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에서 3대에 걸쳐 왕권을 수복하겠다며 끈질기게 영국을 괴롭혔다.
영국정부는 충분히 그런 상황을 예견했지만 제임스 2세 가족을 살려두었다. 찰스 1세
처형의 교훈을 철저히 배웠기 때문이다. 정치 보복으로 입을 영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후유증에 비해서는
제임스 2세의 어그로를 견디는 편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의 탈출을 막고 처형했고,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몰살하며 혁명을 이뤘다. 반면 영국인들은 참으로 현명하고 위대했다. 이후 영국인들은 이 관용의 축복을 300년이나 누렸다. 이후 세상의 주인은 프랑스나 러시아가 아닌 영국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들이 가장 비범하게 관용적이었으니까.
장면 2.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전국 시대를 끝내고 에도 막부를 세웠다. 에도막부는 200년 넘게 일본을 지배했다. 에도막부 – 지방호족인 다이묘– 다이묘가 지역에 거느린 사무라이. 에도 시대는 철저한 신분제로 사회를 안정시키고 상공업을 발전시켰다.
1854년 일본은 미국의 페리제독에게 굴복해 개항했지만 봉건질서는 개항 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따라기엔 역부족이었다. 막부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사무라이들은 1868년 천황을 앞세워 막부를 무너뜨렸다. 개항으로 어수선한 사회의 민중에게 "천황을 받들고 야만인을 내쫓겠다"고 약속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유신을 주도한 사무라이는 반유신 세력과 내전도 불사했다. 그러나 폐번치현을 단행하면서도 영주 가문을 살려뒀다. 막부 측 인재들을 구시대의 인재라고 핍박하지 않고, 각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유도했다. 막부의 마지막 장군은 공작 작위를 주며 포용했다.
사무라이가 포용한 막부의 엘리트들은 서양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꼼꼼히
관심을 갖고 주권, 자유무역, 국제법, 기술, 군사력 같은 서양의 질서에 진입을 시작했다.
이 극적인 진로 수정의 결과는 수십년만에 일본을 세계적인 열강 대열에
올려놓았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무너뜨리고 중국의 속국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일본은 서양열강들이 처음으로 치외법권 모델을 포기하게 했다. 1902년부터
영국인은 일본에서 재판받게 됐다. 1차 대전때 남태평양 독일기지를 점령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까지 승리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근대 서양국가가 아시아 국가에게 패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으니깐. 일본은
이렇게 열강이 되었다.
장면 3.
김대중은 5번의 죽음의
고비, 6년간의 옥살이, 수십년간의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 끝에 그의 인생의 황혼기에 간신히 대통령이 되었다. 전직
대통령들은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한국 민주화의 두 거두였던 김영삼은
92년 대선에서 그를 배신하고 3당합 당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신군부 세력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형 직전까지 그를 몰고 갔었다.
김대중은 누구보다도 복수의 동기가 컸다.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 떨며 잠에 들었던 트라우마는 평생 그를 괴롭혔으며, 김영삼과
신군부의 결탁은 호남을 영원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며
임기 초반 90%에 육박하는 인기를 구가했고, 김영삼은 IMF 외환위기의 주범이므로 그를 단죄하자는 국민적 여론도 높았다.
하지만 김대중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그랬듯이 동시대 누구보다도
역사를 깊고 넓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김영삼이 구속시킨 전두환과 노태우를 풀어줬으며 김영삼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김대중은 집권초 에너지를 정적의 단죄와 지지율에 쏟지 않고, 그 대신 신자유주의 개혁에 힘을 쏟았다.
공공분야를 줄이고, 해외
투자를 유치했다. 적극적인 미국화를 통해 세계시장과 경쟁했다. 또한
반일감정을 자극하며 얄팍한 인기를 누리는 대신,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진일보한 구제국-식민지간 선린관계를 정립하였다.
오늘날 한국인이 한줌의 번영을 누리는 바탕에는 김대중의 관용이 흐르고
있다. 김대중도 김영삼과 문재인처럼 정치보복에만 집중했다면 잠깐의 인기는 누렸을지 모르지만 나라는 퇴보했을
것이다. 김영삼과 문재인의 높은지지율 끝에는 처참한 경제성적표가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김대중의 관용과 비전으로 우리나라는 디지털 전환기 및 중국 부상기에 매우 절묘한 역할을 하며 부상했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되었다. 또한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
결론
복수를 향한 욕망은, 식욕, 성욕 다음으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앙갚음이라는 강렬한 인간 근원의 욕망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복수의 유혹을 억누르고 관용과 화합
미래로 나간 사례는 역사적으로 희소하다. 하지만 그 비범한 선택을 한 나라는 비범하게 부상했다. 영국과 일본 한국이 그랬다. 총선을 앞두고 있다. 정치 보복 외에 어떠한 비전도 잘 들리지 않는다. 누구든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보복을 입에 담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뒤에는 관용과 용서를 실천하고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의 인생이
여태껏 그랬듯 우리 다음 세대도 그 관용과 화해의 정신 위에 번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는 계속 발전하고
인생도 계속 아름답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