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otation
한국이 민심의 나라라면, 일본은
엘리트, 그중에서도 야쿠닌(관리 혹은 공무원)의 나라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젊은 활동가들은 한국사에서 처음 출현한
근대인들이었다. 1898년 그 해 겨울 예정대로 의회가 설치되었다면 을사보호조약도, 한국병합도 그렇게 간단히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1910년 조선이 망한
것은 반일 감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일본을 증오하고 규탄하는 사람들은 전국에 넘쳐흘렀고, 일본을 깔고 멸시하는 사람들도 사방에 빽빽했다. 모자랐던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40년간 일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게 우리의
운명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었다.
일본 국민의 의식은 천황 아래 억눌려 있고, 일본의 민주주의 역시 그 이름 아래 제한 되어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공화국의 시민이다. 황제가 됐든, 천황이 됐든, 임금이 됐든 우리는 그 세계와 연을 끊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황’을 쓰느냐, 어떤 연호를 쓰느냐가 조선백성에게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우리 공화국 시민에게는 아니다. 천황이 아니라 ‘옥황상제’라 한들 가볍게 불러주면 된다. 그게 민주 공화국 시민의 자부심이다.
세계적으로 독일처럼 전쟁 도발국이 사죄한 적은 있지만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한 나라는 없다시피 하다. 열강 대부분이 식민 지배의 공범이니 열강이 만든 국제법에 그에 대한
배상이나 징벌 조항은 전혀 없다. 그렇게 보면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한 드문 예이고, 우리는 옛 식민 종주국에게 사과를 받아낸 거의 유일한 나라다.
당시에도 위안부, 역사교과서
독도 문제 등이 없었던 게 아니다. 김대중이 그런 문제들의 심각성을 몰랐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죽창가를 부르지 않았다. 협상 아젠다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면서, 우리 민족의 도덕적 우월성을 유지하면서 일본을 압박했고 존경을 이끌어 냈다. 그의 계승자들은 도대체 김대중으로부터 무엇을 계승하고 있는가?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엄정성, 애국적 주제일수록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돼야 할 것이다.
조선식민지화의 특수성
대만,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사람들이 식민 본국에 한국처럼 적개심을 갖지 않음. 한국의 ‘반일 감정’은
독특함. 이유 1.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공유하고 고류해온
이웃나라 식민지화.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문화적, 국제적 우월감이
있었으므로 내면에 깊은 상처 2. 조선은 세계 주요 국가 중 가장 늦게 식민지. 제국의 해체 시대에 접어들 무렵 일본은 제국주의 시작 3. 비교적
식민 기간이 짧음
메이지 일본의 성공 비결: 국민
통합
교토를 탈출한 막부의 쇼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본거지인 에도로 돌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천황군은 에도로 돌아왔다. 에도 총공격
하루 전 양측은 합의. 천황군은 에도를 무혈 접수.
에노모토를 항복시켰던 천황군 사령관이 구명에 나섬. 1861년 에노모토는 막부 가신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유학해 5년간
선박항해술, 증기기관, 화학, 국제법 등을 공부. 에노모토는 메이지 정부의 요직을 두루 맡음. 러시아와 사할린 영토 분쟁 때 특명전권공사. 외무대신 4차례 역임. 불과 몇 년전에는 정부군에 끝까지 저항했던 적장.
메이지 시대 일본을 강하게 만든 것은 국민통합. 에노모토 뿐 아니라 막부의 유신들이 메이지 정부에서 활약.